세계의 식량사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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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 73년의 세계식량 파동 이후 식량문제의 심각성을 우려하는 논의는 수없이 되풀이 되어왔으나 현실적인 수급사정은 날로 악화되고 있는 것 같다.
점차 첨예화되고 있는 남북 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식량의 불균형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다른 1차산품에 비해 해결을 위한 노력은 오히려 후퇴한 느낌마저 없지 않다.
이는 지난해 가을의 「로마」식량회의와 지난달의 36개국 식량이사회의 실망적인 회담 결과에 잘 나타난바와 같다.
오직 「가진자」만이 호언할 수 있는 세계경제에서 8억의 인구가 절대 빈곤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성』을 잃고 있다고 한 「맥나마라」유의 호소는 이미 설득력을 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조화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이른바 신세계 경제질서의 모색이 일부 선진부국들 사이에 자주 거론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차원에선 남북문제에의 접근을 시도해 보려는 노력이 눈에 띈 것은 극히 최근의 변화다.
그러나 그나마 이러한 변화조차도 그들의 이해와 직결되어온 국내「에너지」 기구 등 극히 제한된 범위 안에서의 변화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IEA의 「에너지」 장기협력계획이나 OECD 각료이사회의 이례적인 『개발도상국과의 대화에 관한 선언』도 결국은 이들 선진국들의 불가피한 일시적 양보일 뿐 결코 일부에서 주장하듯 남북문제의 획기적인 새 국면으로 간주되는 변화는 아닌 것이다.
식량문제에 관한 한 그나마의 대화 진전도 이룩하지 못한 것은 식량생산·유통과정의 독점도가 여타 1차산품 보다 오히려 높기 때문이다. 식량부국인 미국은 현재 콩·옥수수의 세계 무역량 중 80% 이상을 거래하고 있으며 소맥은 50%를 차지하고 있다.
더욱 더 큰 격차는 식량소비 수준에서 나타난다. 빈곤국의 5배가 넘는 평균곡물 소비량을 전제로 하는 선진국식 식량문제 접근방법 결국 단기적인 불응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핵심이다.
빈곤한 개발도상국들이 10년 안에 식량자급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는 「키신저」의 낙관이나 단위당 생산성을 20년 안에 배가시킬 것이라는 「존슨」교수의 전망 등은 모두 현재의 소비구조를 유지하려는 강인한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개발도상국들은 그들의 가경지 개간이나 단위당 생산성 제고에서 거의 경제적인 한계에 도달하고 있음을 이들은 짐짓 외면하고 있다.
FAO추산으로도 개도국의 경지확대가 향후 10년간 1천2백억「달러」의 신규투자 수요를 유발할 것이라는 점은 이들의 단기적인 식량문제 해결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로마」 회의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단기적으로는 비상식량 원조를 늘리는 길뿐이며 개도국의 근본적인 식량자급을 지원하는 이른바 농업개발 기금을 어떤 형태로든 설립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지난 가을 회의에서 기금출연 계획까지 마련하고도 선진국의 주도권 싸움으로 실현을 못보고 있는 이 기금 문제는 식량문제에 관한 새 국제질서 형성의 기반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의미 있는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최근 세계 곡물시세가 다소 안정되기는 하였으나 선진국의 높은 곡물소비 추세가 여전히 지속되고, 미국 행정부의 정책적 관여가 계속되는 지금으로서는 또 다른 식량파동이 도래할 수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FAO 사무국장은 75, 76 농업년도 중 세계적으로 1천4백만t내지 2천만t의 식량부족을 예견하고 있다. 주곡자급을 이룩했다하나 아직도 7억「달러」내외의 외곡을 도입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로는 농업투자를 늘려 실질적인 식량자급을 달성하도록 한층 노력하는 길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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