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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품도시일손 농촌으로 역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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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통금이 막 풀린 이른 새벽4시30분. 서울 서대문구 노고산동 신촌로터리. 허술한 노동복차림의 청·장년들이 짝을 지어 몰려든다. 하루의 일자리를 찾는 뜨내기 인부들의 집합소― 날품을 사고 파는 이색 노동시장이다. 이 노동시장에 요즘은 이변이 생겼다. 도시의 경기가 별로 탐탁스럽지 않는 대신 농번기의 노동력이 모자란 탓으로 날품근로자들은 농촌에 일자리를 쫓아 빠져나간다.
상오5시를 전후해서 이색노동시장엔 흥정이 한창이다.
「뎁방」(철판꾼) 넷, 물「도리」(물통운반) 둘, 「시멘·도리」둘―. 이른바 「오야가다」의 주문이 떨어지자 거간격인 인부「다시」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다 금방 8명의 인부들을 짝지워 택시에 태워 작업장으로 떠나보낸다. 노동시장에는 아직도 귀에 거슬리는 일본말들이 그대로 남아 버젓이 쓰인다.
상오8시·노동시장은 파장을 한다. 일거리를 얻지 못한 인부들은 『또 「데마찌」났구나』(공쳤다)하고 투덜거리며 힘없이 돌아선다.
이같이 별난 노동시장은 신촌로터리 외에도 남대문시장 앞·영등포시장 앞 로터리·동대문·창신동·대조동등 서울시내에 6∼7군데가 있다.
이곳을 찾아드는 인부들은 미장이·타일공·페인트공·상하수도 수리공, 기와·콘크리트·벽돌·조림공 등 가정집 수리에서부터 빌딩 신축공사에 이르기까지 줄잡아 8천여명.
조합이나 단체에 가입되지도 않고 별다른 조직도 없는 이들은 그저 하루일거리에 만족해야 한다.
이들이 받는 하루품삯은 기술에 따라 1천원∼4천원씩으로 일거리를 찾을 수 있는 날은 한달 평균 15일정도. 초여름이면 성시를 이루던 노동시장도 올해에는 도시의 불경기에 휘말려 도시의 각종공사장이 줄어드는 반면 농가의 일손은 바빠지게 되자 유휴노동력이 농촌으로 다시 흘러들어가는 역류현상을 빚고있다.
도시의 불경기와 함께 최근 들어 며칠째 공친 인부들은 인근 경기도 고양·파주·양주·시흥군 등 서울변두리의 농촌에 품팔이를 간다. 요즘 농촌의 일손은 해가 갈수록 부족되어 품삯이 하루 1천원∼1천2백원(점심제공)으로 오히려 실속이 공사판보다 낫다.
이에 따라 이곳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잡역부들은 모내기·추수철인 농번기에 각처 농가로 나가 품을 판다. 지난 5월20일쯤 잡역부 20명이 한달계약으로 경기도 김포군 농가로 모내기를 떠났으며 서울변두리 농촌에서 하루 10여명의 농부들이 신촌로터리에 찾아와 일손을 구한다.
콘크리트공으로 14년동안 일해온 박재훈씨(33·서대문구 홍은2동 산33의68)는 『워낙 농사일을 해본지 오래되어 선뜻 농촌으로 갈 자신이 없어 못 갔다』면서 다른 사람들 가운데하루 20∼30명이 농촌품팔이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신촌로터리 노동시장은 농촌을 떠나 무작정 상경한 20대 젊은이들이 일정한 직장을 구할 수 없자 삼삼오오 짝을 지어 로터리 주위에 몰려앉아 품꾼을 구하려는 고객을 기다리는 곳으로 「노동시장」을 이룬지 이미 오래.
62년 경북대구에서 상경, 이곳에서 줄곧 품을 팔아온 황룡철씨(29·서대문구 연희2동123)는 『서울도 많이 변했지만 경기도 많이 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황씨는 『요즈음은 한달에 고작 열흘 일하면 다행이다. 차라리 농촌에 가서 품팔이나 해야할 것 같다』면서 4∼5년 전의 흥청대던 공사장경기를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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