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워치] 세계 '무질서 시대' 오는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미국사에서 19세기 중반은 팽창의 시대였다. 서부 진출 러시가 일어나면서 텍사스.캘리포니아.오리건으로 사람들이 몰렸다. 당시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는 멕시코, 오리건은 영국이 주인이었다.

미국인들은 이 축복받은 땅이 기독교 정신에 불타는 미국의 땅이 돼야 하며, 그것이 자신들에게 신이 부여한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고 믿었다.

'명백한 운명' 신봉자들은 미국의 영토 확장이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를 전파하는 박애적(博愛的) 행위라고 주장했다. 결국 텍사스.캘리포니아.오리건은 미국 땅이 됐다.

19세기 말 북미 대륙에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할 땅이 남지 않자 미국은 또 다른 '명백한 운명'을 실현할 땅을 해외에서 찾았다.

태평양의 하와이와 사모아제도를 차지한 데 이어 1898년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쿠바.프에르토리코.괌, 마지막으로 필리핀을 손에 넣었다. 또 '문호개방'을 선언하면서 뒤늦게 중국에 뛰어들어 이권을 챙겼다. 새로운 '제국주의 공화국' 미국이 탄생한 것이다.

조지 W 부시의 외교정책은 '명백한 운명'의 21세기 버전이다. 세상을 선과 악 둘로 나누고, 선을 대표하는 미국이 악을 응징할 사명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처럼 행세한다.

악이 자라 더 큰 악이 되기 전에 싹부터 자르겠다는 것이 부시 독트린의 요체(要諦)다. 미국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지목하고 사담 후세인 '정권 교체'를 목표로 삼았다.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세워 이를 발판으로 중동 전역에 '민주화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겠다고 공언한다.

미국은 이라크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제1441호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무력사용을 주장하더니 무력사용을 승인하는 새 결의안 채택이 무산되자 스스로 유엔 헌장을 위반하고 있다.

유엔은 안보리 결의가 있거나 자위권 행사를 제외하곤 전쟁을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의 입김으로 유엔 사무총장 자리에 오른 코피 아난도 유엔의 승인 없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며 위험한 행동이라고 통렬히 비판했다.

이라크 침공은 미국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전쟁 후가 더 걱정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질서 유지의 기본 틀이었던 유엔은 위신을 실추했다.

앞으로도 미국의 '유엔 우회(迂廻)'는 계속될 전망이다.이와 함께 유럽의 안정을 책임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도 상당기간 기능 정지 상태를 면하기 어렵다.

헨리 키신저 전(前) 미 국무장관은 현재 상황을 "미국 외교의 역사적 전환점이자 결정적 전기"로 규정하면서 "지난 반세기 동안 유지돼온 기본 가정들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게 됐다"고 지적한다.

전쟁은 이라크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라크 전쟁은 시작일 뿐이다. 같은 '악의 축'인 이란과 북한, 그리고 시리아.레바논.리비아.수단.사우디아라비아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아랍인들은 이라크 침공을 현대판 십자군전쟁으로 본다. 그들의 분노는 미국에 대한 테러로 나타나고, 친미 아랍국가들의 정권 타도 움직임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상황은 이라크를 모델로 중동에 민주화 바람을 일으킨다는 미국의 계획에 타격을 가할 뿐 아니라 세계를 끝없는 전쟁에 빠뜨릴 위험이 있다. 바야흐로 영구(永久) 전쟁의 시대, 세계 무질서의 시대가 열리는 것인가.

정우량 국제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