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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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패자에겐 깃발이 없다. 색깔도 무늬도 없는 백기만이 있을 뿐이다….
천치의 얼굴 같은 흰 깃발 위에 마지막 쓰고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후회라는 말이다. 어머니를 잃고 나서 효도를 배우는 자식들, 이것이 「사이공」사람들이 갖고있는 도덕심이다. 잃어버린 것들을 후회해야 된다. 뼈저리게 후회해야 된다.』
「문학사상」 6월호 부록으로 특집 되어있는 「사이공」 대학생들의 수기 중의 한 구절이다.
일간지에 초록으로 소개됐을 때 읽으면서 가슴에 오는 것이 큰바있었지만 다시 잡지에서 그 전문을 읽어봐도 감동의 여파는 여전히 출렁이는 것이 있다. 그 피맺힌 목소리가 육성으로 들리는 것 같다. 절망의 낭떠러지를 눈앞에 두고 피흘리는 상처를 입은 젊은 지성인들의 신음소리가 처절하다.
「우리는 안다」 가슴이 화약을 품고 있다는 것을. 더욱 짙게 흡혈귀처럼 피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짓밟고 다가오는 친구는 「배반의 무리들이 무리 지어」 온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그 절망을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다. 다가오는 절박한 현실 앞에서 절규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끝나고 말았다. 그들의 신음소리도 절규도 마지막 비명소리도 이제 모두 끝나버린 것이다.
「후회」는 언제나 앞서는 것이 아니고 뒤에 오는 것이라 했다. 그들의 「후회」를 우리의 「자각」과 「결의」로 바꾸어야한다. 우리는 「후회」가 뒤에 와서는 안되겠다. 월남 대학생들의 수기인 <「사이공」 최후의 목소리>를 6·25를 어른들의 이야기로만 들어온 젊은 세대들에게 읽히고 싶다. 그들의 절망, 그들의 「휴머니티」, 그들의 문장을 우리 젊은이들에게 읽어주고 싶다.
사람이 절박한 처지에 다다르면 착한 경지, 또는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말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들의 글을 읽으면서 바로 그런 것을 찾아볼 수가 있다. 우리에게만 오는 감동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자유민들의 가슴에 같은 감동으로 전달될 글들이라고 생각한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의 절규라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들의 문장이 또한 훌륭하다. 그 경황 속에서 이러한 귀중한 자료들을 수집해서 가져온 이숙자씨의 관심과 성의도 놀라운 일이고 또한 그의 손을 거쳐 번역된 것인 만큼 그동안에 다듬어진 글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그들의 문장력이 만만치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전쟁 속에서도 그들이 배워온 교육과정은 그렇게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들의 문장이 증명해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글들을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읽히고 싶다.
『스물세살의 여자에게 있어 우주라는 것은 그렇게 넓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남자의 가슴 넓이만 한 것입니다.
스물세살의 여자에게 있어 행복이란 것은 그렇게 사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꽃수레의 포장만 있으면 됩니다.
스물세살의 여자에게 있어 평화라는 것은 피를 흘리며 빼앗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조용한 신방에 켜진 저녁 촛불입니다.』(잃어버린 결혼식 서두에서) 【정한모<서울대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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