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 언동과 형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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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는 법 만능의 풍조가 팽배하고 있다. 정치·사회적인 문제를 비롯해서, 도덕과 양심에 관한 문제까지도 법 규제를 해야겠다는 소박한 생각이 고개를 내밀 곤한다.
물론 법제의 미비를 개선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일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되기는 어렵다. 특히 정치·사회적으로 어려운 문제들이 제기되었을 때에는 법 이전에 그 원인을 찾아내 이를 제거하기 위한 성실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비로소 근본적인 해결의 길이 열릴 것이다.
이번 임시 국회 회기를 사흘 앞두고 전격적으로 제출한 「사대적 언동」 규제를 위한 형법 개정 법안도 너무 소박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을 금하기 어렵다.
국내 문제를 외국에서 또는 외국인을 상대로 떠들어대는 행위는 마땅히 삼가야할 일이다. 외국의 힘을 빌어 국내 문제를 자기 편에 유리하게 유도하겠다는 생각은 속이 들여다 보이는 천박한 태도라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본질상 국민의 도덕적 심성의 문제라 할 수밖에 없는 이 같은 언행을 꼭 법을 만들어 규제하는 것만이 그 해결 방법이겠는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일이다.
오히려 외국인들이 일부 사대주의적 언동에 관심을 표명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깊은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고려 없이 이 개정 법안을 강행 통과할 경우 국내의 사대적 언동은 어느 정도 규제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러한 언동에 관심을 표명하는 외국인들의 성향을 더 깊게 하는 원인이 될까 우려되는 것이다.
신설 조항은 외환의 죄에 포함 되도록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조항은 형법 제5조에 의해 대한민국 영역 외에서 행한 외국인의 행위에까지 미치게 된다. 예컨대 외국의 특파원이 국내에서 기사를 송고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국 보도 기관이 외국에서 이 법 조항에 위배하는 보도를 할 경우에도 적용된다는 얘기다.
물론 국제법상 국내에 있지 않은 외국인을 직접 처벌할 수는 없겠으나 이 법을 위배한 외국인이 국내에 들어 올 경우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막상 외국인, 특히 외국 특파원이 이 법에 의해 처벌 대상이 됐을 때 언론 자유뿐 아니라 인권 문제에 관해 국제적으로 더욱 복잡한 문제를 야기할 소지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되면 일부 인사의 사대적 언동과 이로 인한 국가 위신 추락을 막으려던 것이 도리어 우리의 대외적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법의 내용상 국가 및 헌법 기관 모독 행위를 외환의 죄에 포함시키는 것이 꼭 타당한지부터가 의아스럽다. 처벌 대상의 행위가 국가의 대외적 지위를 침해하는 것이란 면에서는 일단 수긍이 가지만 외환의 죄가 대체로 외국과 통모 하여 적국을 이롭게 하는 경우를 상정한 것이란 점에선 이해가 어렵다.
또 신설 조문의 범죄 구성 행위가 너무 막연하고 광범하다는 사실도 이령비령의 남용 소지를 다분히 가진 것이다. 『모욕 또는 비방』의 비방이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가리키며, 또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도 참으로 막연하다 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안전·이익 또는 위신을…해할 우려가 있게 한 자』란 법문의 「해할 우려」의 기준을 어디서 찾느냐는 어려움과 「기타 방법」이란 행위의 포괄 규정은 이 법의 적용에 있어 국민에게 심한 불안감을 주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야당의 총력 저지 방침 때문에 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면 또다시 국회의 격돌과 변칙이 불가피한 형편이다. 이러한 무리를 무릅쓰고라도 꼭 법으로 규제할 만큼 이러한 「사대적 언동」이 심각한 문제이냐를 재삼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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