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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우씨 논문『기자고』에서 기자조선은 청동기문화 옮겨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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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사학자 천관우씨는 사학 계 일부에서 신화시대라고 도외시 해 버리려 하는 고조선 시대를 고고학적 측면과 부합시켜 연구, 그중 기자조선이란 청동기 문화를 가진 민족의 이동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풀이함으로써 그 실재를 주장했다. 천씨는 최근 간행된『동방학 지』15호에 장편의 논문『기자고』를 발표, 기자전승에 관한 이제까지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중국 고대의 은나라 민족과 기자족 및 그 이동상황을 새로운 각도에서 살폈다.
이 논문은 문헌상에 명시된 기자조선의 말기가 기원전 3세기 이후이지만 쇠붙이를 쑬 줄 아는 기자족은 수 백년간에 걸쳐 한반도 쪽으로 서서히 이동 해와 신석기 단계의 농경사회였던 회군조선과 대체 되었으며 그 무렵에 대동강유역에 철기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고조선에 비로소 국가 형성기를 맞이하게 됐다고 말했다.
즉 천씨는 기자족이 동래 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중국은 나라를 포함한 청동기 문화민족의 이동의 일환이란 점에서 그것이 단순한 외세지배는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데 뜻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기자는 은나라 말의 삼 인에 드는 인물의 하나로 은실의 한 족속이다. 그 족속은 당초 황하 중류지역의 일대 세력이었으나 기원전 11세기께 부터 서서히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자에 대하여는 한국사만이 아니라 중국사에도 깊이 관련돼 있는데 다만 이제까지 그에게 관한 연구는 중국문헌에만 의존할밖에 없었다.
그런데 은나라 민족은 오늘 중국인을 형성하게 된 여러 요소의 하나에 불과할 뿐더러 한국에 있어서의 기자족도 오늘의 한인을 형성한 여러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은은 본시 발해부근에서 발생하여 중국 하남 성으로 남하했다가 다시 정주방면을 거쳐 안양(은허)방면으로 북상해 정착하였다. 기자족은 거기서 갈라진 한 갈래이다.
은인은 중국문헌에서 말하는 동이의 한 줄기로 추측되므로 기자족은 그 일족으로서 당연히 동이이다.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기자족의 첫 근거지는 지금의 중국 산서성태곡현 일대에 있던 기국이다.
그들은 은나라에서 주나라 초기에 걸쳐 막중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나 신흥세력인 주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그 주력이 동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었다. 중국의 문헌에 기국이 은나라 제후국의 하나였다는 기록을 따른다 해도 그것은 은 말기의 일이겠고 기자의 망명이란 그 족속의 동천을 의미한다. 그 이동세력은 저항을 하면서 요 서를 거쳐 한반도에 미치는 반면 일부는 고지에 건국한 진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기자족의 이동과정에서 처음 정착한 곳은 발해만의 산해 관 가까운 낙하 하류이다. 그리고 오랫동안에 걸쳐 요서·요동을 거쳐 마침내 평양지역에 도달하게 된다. 문헌상에 나타나는 창려(요서)·광령(요동) 및 낙랑(대동강하류)등지의 험독은 그 이동과정에 있어 한동안 근거지를 삼았던 곳- 바로 왕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같이 기자족의 이동은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며 은 말의 기자가 직접 이끄는 무리가 한반도에까지 이르렀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자묘가 한반도에만 있는 게 아니고 중국 하남에도 3개 처나 있듯이「험독」「왕험」「왕검」이란 말도 기자족의 동방이동에 따라 옮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이란 지명은 기자족이 오기 전부터 있었다고 추측되는데 본시는 발해연안(낙하하류 고죽국)에 있던 시기가 있고 그 다음 기자족의 동진과 함께 요서·평양지역으로 옮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기자동래란 기자를 조신으로 섬기는 한 무리(족단)가 평양지역에 도달한 것으로 해석된다.
기자족이 한반도에 미치는 경로를 이같이 살핀 천씨는『그러나 기자조선이 고대통일국가로서의 통치 력을 분명히 행사했다고는 보기 어려우며 다만 기자족의 중심세력이 평양지역에 최종 정착지를 얻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기자조선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은 말 주초의 이른바 기자동래 이후 오랜 공백기간을 거치게 되며 그 말기(BC 3세기)인 부왕과 준 왕 시대로 건너뛰고 있다. 그러므로 평양지역에 있어 기자조선의 시발은 BC 3세기보다는 훨씬 앞서는 것이 분명하다.
기원전 3세기께는 연 나라에 의하여 수동지방까지 장악된 시기이자 한반도에 철기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한 시기. 이 무렵부터 고조선에 처음으로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천씨는 주장했다.
기자족이 중국 북부지역을 떠나던 은 말 주초(BC11세기)께는 청동기문화가 상당히 성숙된 시기였고, 또 이 무렵 북방에서는「카라수크」및「오르도스」일대의 청동기 문화가 뚜렷해져 있던 때이므로 기자족이 앞서 청동기문화에 접해 있었을 것은 능히 상정할 만하다.
단군신화에서 농경을 아는 무문토기인이 채집어렵의 유문토기인을 정복, 동화했음을 반영하고 있듯이 기자족의 동진은 바로 농경민의 단군 족을 압도한 금속문화 단계임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씨는 우리나라에 있어 청동기시대의 상한 년대가 BC 4세기, 혹은 BC 10세기 등 견해차가 많으므로 기자족의 도착시기를 아직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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