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일랜드의 정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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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타이랜드 는 민주당정의 첫발을 내딛는 총선 을 끝냈다. 학생들의 민주혁명이후 15개월만에 실시된 이번 선거는 하원의원 2백69명 을 뽑기 위한 것이었다.
한가지 특색은 어느 당도 과반수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학정이 불가피 하게 되었다. 독재가 무너진 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치 혼의 일맥이다. 독재정치는 어느 경우나 뚜렷한 세력의 야당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일랜드의 정정은 민주혁명이후 악관과 비관이 엇갈리고 있었다. 비관논의 근거는 결국 정치혼란이 쿠데타와 같은 변칙사태를 불러들일 것이라는 관측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기분에 따른 비관이나 악관은 무의미하다.
타일랜드에 최초의 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1932년이었다. 당시 타일랜드는 세계공황의 여파에 밀려 경제형편이 몹시 악화되어 있었다. 이른바 무단파와 문치파의 합작으로 쿠데타가 성공했다. 그해12월 타일랜드는 역사상 처음으로 헌법을 세운 군주국으로 새 출발을 하게되었다.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40여년의 헌정기간에 쿠데타가 무쳐 10차례나 일어났다. 그중 에서도 가장 오래 지속되고, 혹독했던 정권은 지난 73년10얼에 무너진 타놈파였다.
이들의 집권이 10년을 넘기자 국민들은 기어이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타놈은 쿠데타 12년만에 헌법을 제정하고 군복을 입은 채 정당을 창설했다. 의회정치의 구색을 갖추어 다시 집권 태세를 갖춘 것이다.
그러나 소제에 익숙한 집권자에게 의원정부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의회에서의 날로 그라스루츠(초근)처럼 확대되어 갔다.
한편,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은 농·공의 격차를 만들어 하구의 경제구조를 이루었다. 3차로 그 계획을 시행하려하자 이번엔 재원이 없었다. 외자도 국내의 정석이 불안하자 순조롭지 못했다. 타놈은 1971년11월 장남 나롱 대령의 세를 업고 이른바 당위 쿠테타를 일으켰다. 귀찮은 .의회 해산하고. 법정을 폐지하고, 계획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사회 안녕을 구실로 범법자들을 극형에 처하고, 반대파의 공무원을 부패로 몰아 추방했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타일랜드판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났다.
군의 헬리곱터가 추락했는데 그 속엔 여비배가 타고 있었다.
이번엔 언론인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그 사실을 한사코 폭로했다. 타놈은 학생들의 데모를 진압하기 위해 2백여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대세는 그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정의에 대한 포용력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불의에 기우는 인문의 성향은 민주주의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타일랜드의 오늘을 생각하며 새삼 R·니버의 말이 상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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