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서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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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흔히「신언서판」이라고 한다. 원래는 당대에 관료를 뽑는 방법으로 쓰였던 것인데, 널리 사람을 보는 기준이 되어 버렸다.『신은 체모의 풍위, 언은 언사의 변정, 서는 해법의 준미, 판은 문리의 우장을 말한다』고『당서』에는 적혀 있다.
사람을 깊이 사귀기 전에는 첫 인상으로 판단하기 쉬운데 훤출하고 말 잘하고 글씨 잘 쓰고 똑똑한 사람이 돋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 인간의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다고「재색겸비」란 말도 있지만「재승박덕」이란 말도 있다. 그래서인지『당서』 는 이어 덕에 앞서「신언서판」을 보는 까닭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있다. 재로써 덕이 고르게 되고, 노로써 재가 고르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옛날의 교육은 과거를 위한 것이요, 과거는 관료가 되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 기준은 태학생의 선발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을 것이다. 요새 대학에도 학교마다 입시요강이 있어 대개 『학업에 지장이 있다고 인정되는 장애자에 대하여는 입학을 불허한다』는 조문이 있다.
이를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색맹이 회화과를 지망한다든지, 사지가 불편한 자가 체육과를 지망한다든지 할 경우에는 입학시킬 수 없다는 정도의 뜻이나 아닐지. 설마 성악과를 지망하는 언어장애자는 없을 테니 이런 예를 찾아 모조리 들 필요는 없겠다.
그런데 사실은 좀 다르다. 이번에 연세대에 합격한 이익섭군은 과거 2년 동안이나 그가 실명했다는 이유로 어떤 대학에서 지원조차 거부당하였다. 대학이 자선 사업기관도 아니니,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멀쩡한 학생도 붐비는 판에 그럴게 뭐 있겠느냐는 그 대학의 뜻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불구가 된 것도 서러운데 모처럼 발분하여 학업을 계속하겠다는 젊은 학생에게 굳게 문을 닫는 처사는 너무도 몰인정하다. 몸도 불편한데 꼭 대학을 가야 맛이냐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는 또 다른 문제이다. 학업에 큰 지장이 없는 한 그들에게도 문호는 개방되어야 한다. 그들이 정당히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뺏을 권리가 과연 대학에 있는지 모르겠다.
누구의 인생이나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교육기관에서 이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육의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바이런」이「마라토너」가 되겠다는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하찮은 벌레도 제 살길을 찾는데 신체에 장애가 있는 학생이 어찌 학업에 지장이 있는 전공을 택하겠는가. 이런 문제는 그들에게 맡겨도 된다.
금년만 해도 고교를 졸업하는 이런 학생의 수는 1천2백여 명이나 된다. 그들이 어디로 갈 것인지 이는 큰 사회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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