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임금을 심란하게 했던 꼬리별 정체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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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별을 바라보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를 듯 싶다. 가령 ‘서시(序詩)’를 쓴 시인 윤동주(1917∼45)에게 별은 운명을 기꺼이 수락할 힘을 주는 따듯한 존재였다. 요즘 한창 인기인 TV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여주인공 천송이에게는? 외계인 연인 도민준의 고향쯤이 아닐까.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별은, 그중에서도 혜성은 재앙의 상징이자 혁신의 상징이었다. 한국천문연구원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안상현(43)씨의 주장이다. 혜성의 운행을 명분으로 왕권에 도전하는 거사를 합리화하거나,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곤 했다는 얘기다.

 안씨는 우주의 시원(始原)을 캐는 우주론과 천체물리학을 전공한 천문학자다. 어려서부터 축적한 한문실력이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등 역사서에 나타난 천문관측 기록을 추적하는 역사천문학으로 일찌감치 방향을 돌렸다.

 10년 넘는 공부 이력을 쏟아부은 『우리 혜성 이야기』(사이언스북스)를 이번에 펴냈다. 혜성이 재앙 또는 혁신의 상징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사례를 풍부하게 담았다.

 20일 안씨를 전화 인터뷰했다. 그는 “한국은 2000년에 걸친 막대한 혜성 관측 기록을 가진 거의 유일한 나라”라는 얘기부터 꺼냈다. “일본은 기록의 양이 적고, 중국은 남기고 싶은 역사만 남기려 한 왕의 개입으로 혜성에 대한 기록마저 왜곡됐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이슬람 제국,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 조선 세종 때의 천문학 융성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혜성과 관련해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방대한 자료가 있다.

 그는 “1997년 핼리 혜성보다 100배나 밝은 헤일-밥 혜성을 목격했을 때 두려움마저 느꼈다”고 했다. 그런 천체가 느닷없이 나타났을 때 옛 사람들은 자연히 우주 질서의 교란, 그에 따른 전쟁·죽음·질병 등을 떠올렸을 거라는 해석이다.

 조선시대 남이 장군은 1468년 혜성을 두고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했다고 한다. “혜성은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한 발언이 정적에 의해 반란 모의로 조작됐다.

 영조는 누구보다 혜성의 출몰에 관심이 컸다. 1759년, 하루가 멀다 하고 별을 관측하는 측후인(測候人)인 안국빈을 조정으로 불러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눴다.

 임금= 혜성의 모습이 어떤가?

 안국빈=약간 커졌습니다.

 임금=금성만 한가?

 안국빈=모양은 같지 않습니다.

 임금=그것이 (인간사에) 영향을 미칠지 여부는?

 현명한 임금 영조가 혜성에 의지한 것은 시대의 한계일 것이다. 그런데 안씨의 관심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영조를 심란하게 했던 혜성은 핼리 혜성이었음을 계산해낸다. ‘호라이즌’이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해, 월(月)까지 밝히며 영조의 혜성을 같은 시간대 유럽 천문학계의 혜성 관측 열기에 연결시켰다. 혜성 관측은 전지구적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안씨는 “일본과 중국만 해도 이 분야에서 어느 정도 결실을 거두고 있는데, 우리는 조상이 남긴 관측자료가 풍부한데도 방치되고 있는 점이 무엇보다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역사천문학에 관심 있는 연구자가 국내에 10명쯤 된다. 그간의 연구성과를 대중에게 알리고 역사천문학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싶어 책을 썼다”고 덧붙였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프리랜서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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