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눈가림이냐…진짜인하냐…저렇게 내릴 수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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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6면

가격합리화냐, 깜짝쇼냐.

할인점 삼성테스코 홈플러스가 지난 6일부터 1천개 품목 제품 값을 영구히 내렸다. 그것도 한꺼번에 10~30%씩 인하했다. 홈플러스는 이를 새로운 가격인하 제도인 '프라이스 컷'이라고 소개했다.

특징적인 것은 프라이스 컷이 일회성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홈플러스는 올 하반기에 한번 더 대대적인 가격 인하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우리도 일본 등과 같이 디플레이션 시대가 온 게 아니냐는 성급한 얘기까지 나온다.

경쟁업체들은 홈플러스와 동시에 대상 상품의 가격을 내리는 등 맞대응에 나섰다. 그러면서 "홈플러스의 인하 대상 상품을 보면 이미 타할인점에서 더 싸게 팔거나 소비자한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비인기 상품이 많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홈플러스의 '가격인하의 진실'은 뭘까. 소비자 입장에서 한번쯤 꼼꼼히 따져 볼만하다.

◆ 조삼모사(朝三暮四) 논쟁=홈플러스는 '프라이스 컷'이 새로운 개념의 획기적인 가격제도라고 말한다.

할인점은 그간 특정한 시기에만 일부 품목의 가격을 내렸다가 행사가 끝나면 다시 원래대로 올리기를 반복하는 이른바 '하이-로(High-Low) 전략'을 써왔다. 소비자를 유인할 때는 최저가로 할인행사를 벌인 뒤 얼마 있다가 값을 원위치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홈플러스는 상품마다 적정가를 계산해 냈다고 한다. 할인해서 팔았다가 다시 비싸게 파는 일을 반복하지 않고 최고가와 최저가 사이에서 가격을 책정해 이를 항상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홈플러스의 설도원 상무는 "소비자들이 할인점은 특정한 시기에만 싸고 다른 때는 비싸다는 인식이 확산돼 대책마련 차원에서 이 제도를 도입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이어 "영국에서 이미 6년간 시행해 보고 성공해 우리도 그대로 도입한 선진 기법"이라며 "제도를 시행하기 전에 경험 많은 본사의 연구팀이 국내에 파견 나와 3개월간 공동 작업을 벌였다"고 밝혔다. 문제는 싸게 팔다 밑지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코카콜라 1.5ℓ 한 병은 정책적으로 국내의 어느 할인점이나 똑같이 1천50원에 납품된다. 더이상 깎아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홈플러스는 이번에 9백50원의 가격표를 붙였다. 코카콜라 한 병을 팔 때마다 1백원을 손해보는 셈이다.

이번 제도를 만드는 데 참여한 홈플러스의 박진호 부장은 "올해 예상매출 3조5천억원 가운데 0. 8%인 2백80억원과 원가 절감분 등을 포함해 총 3백억원을 소비자에게 돌려준다는 방침"이라며 "싸게 판다는 이미지를 높여 매출을 더 올리는 일종의 '장기 투자'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홈플러스는 이를 '프라이스 인베스트먼트(가격전략을 통한 투자)'라고 부른다. 가격인하로 발생하는 3백억원의 손실을 투자로 생각하겠다는 얘기다. 따라서 이 제도는 소비자에게 실제로 싸게 팔고 이윤을 적게 남기는 제대로 된 가격 전략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경쟁업체들의 시선은 따갑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소비자에게 별 이익이 없다는 반박이다.

경쟁업체의 한 관계자는 "몇개 품목을 제외하고는 값을 내린 1천개 가운데 실제로 소비자들이 즐겨 찾는 상품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농심 신라면.오리온 초코파이 등 인기상품이 가격 인하대상에서 빠졌다는 것이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이에 대해 "1위 제품의 경우 가격 결정권을 제조업체가 쥐고 있어 당장 대상 품목에 포함시키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게 사실"이라며 "제도가 뿌리내리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또 다른 업체 관계자는 "당초 인하된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발표와는 달리 경쟁업체들이 홈플러스보다 값을 더 내리자 40여개 품목에 대해 또다시 내리는 등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말했다.

◆ 제살깎기 경쟁 각오=할인점이 몰려있는 서울 영등포지역에서 '웅진 고칼슘 오렌지(1. 5ℓ)'가격은 최근 2주동안 4번이나 내렸다.

홈플러스가 먼저 2천5백원대의 '고칼슘 오렌지'의 가격을 2천2백90원으로 내렸다. 그러자 경쟁업체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더구나 이마트 등은 '최저가격 보상제'를 운영하고 있어 값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이에따라 이마트는 2천80원까지 값을 낮췄다. 그러자 홈플러스도 2천80원으로 다시 값을 맞췄다.

이마트는 최근 1천8백80으로 또다시 값을 대폭 내렸다. 홈플러스의 새로운 가격정책 도입이 업체간 '가격전쟁'으로 비화된 것이다. 게다가 과거같이 일회성 경쟁이 아닌 장기전으로 들어갈 태세다.

홈플러스는 "이번에 값을 내린 상품은 앞으로 특별한 인상 요인이 없는 한 계속 현상태를 유지할 방침"이라며 "향후 추가적인 가격 인하가 더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 확산되는 파장=가격내리기 경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이젠 할인점들도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다. 한 할인점 관계자는 "팔면 팔수록 손해보는 코카콜라의 경우 많이 안팔리기만을 바라고 있는 상황"이라며 "코카콜라 판매대 바로 옆에 두유 등 최고 인기상품을 진열해 놓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이 코카콜라에 시선을 주지 못하게 하자는 전략이다.

할인점들의 싸움에 더 긴장하는 곳은 제조업체다. 당장은 유통업체들이 가격인하에 따른 손실분을 떠안겠다고 했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납품업체에 원가인하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 때문이다.

한 납품업체의 관계자는 "아직 직접적인 원가인하 요구는 없었지만 거꾸로 다른 할인점에 공급하는 제품 값을 올릴 것을 요구하는 사례가 있다"며 "가격경쟁이 어려운 상품은 아예 판매대에서 철수해 달라는 우회적인 압력도 있었다"고 말했다.

일부 식품업계에서는 한때 영업담당자 모임을 갖고 할인점에 대한 납품을 집단으로 거부하는 방안을 논의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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