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고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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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문교당국은 학사고시의 실시를 검토해 보겠다는 언질을 국회에서 주었다. 학사고시는 이미 시행해본 결과 백지화된 경험까지 있는 제도이다. 개폐가 무상한 정책이 그것 하나만이 아닌 현실에서 학사고시의 재시도를 검토해 보겠다는 것을 문제 삼을 것은 없다.
문제는 학사고시가 정말 필요한가에 있다. 그것은 일종의 자격시험이다. 이 고시에 합격하면「학사」가 되고, 불합격이면「학사」라는「타이틀」을 가질 수 없다. 그 점에 있어선 운전사면허시험이나 다를 것이 없다.
「학사」를 면허취득자의「카테고리」에 포함시키려는 발상은 실로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궁금하다. 언젠가 한 정치고위인사는 사회의 각종 임용시험에 반드시 학력을 요구하면 배타적인 제도를 재검토하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공무원의 임용시험에는 그것이 많이 완화된 것으로 안다. 독학자라도 얼마든지 관계에 진출할 수 있는 문호가 개방(?)된 셈이다. 학력 무용론이 햇빛을 본 것이다.
바로 그 정치의 일맥 속에 포함되는 문교당국의 학사자격고시제 구상은 자가당착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행정의 논리성여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종래의 학사 고시제가 실패한 원인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형식주의에 시종하게 된 비 진지성에 있었다. 대학가의 문전에「학사고시준비학원」이 생기고, 정작 그 고시제는 수준을 알 수 없는「○×문제」따위로 속화되어 있었다.
4년제 대학의 정규과정을 성실하게 밟은 학생도 학사고시용 공부를 다시 해야 되는 식은 무슨 면허를 받는 과정이나 비슷하다. 따라서 대학의 수준도 하루아침에 고시의 수준으로 전락했었다. 대학이 단순히 학사고시합격을 위한 학원의 수준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난센스」다.
『훌륭한 교양과 지식선별의 능력을 갖는다』는 것과『학사고시에 합격한다』는 것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이 사회가 요구하는「학사」는 과연 그런「자격」취득자만일지 궁금하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학생들은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어떤 특성을 갖는다. 가령 수학을 가르치는 고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학교도 있다. 어느 수준만 되면 그이상의 수학공부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대학은 그보다도 한 단계 높은 교육을 하는 곳이다. 사립과 국립대학의 개성도 그렇지만 그 수백, 수천의 교과내용에 있어서도 저마다 다양한 성격을 갖고 있다. 현실적으로는 또 우열의 차이마저 있다.
그렇다면 고시의 기준은 어디에 둘 것인가. 모든 기준을 자격과 틀에만 맞추려는 관료적 사고방식은 우리 사회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 한편 두렵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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