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광의 심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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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사형 선고를 받은 문세광은 항소할 뜻을 밝혔다 한다. 그가 앞으로 뭐라 자기 변호를 하려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의 변호사는 또 뭐라 변론을 할 것인지.
어느 살인에나 동기가 있고 이유가 있다. 적어도 근대 문학 이전의 작가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도스트예프스키」가 그려낸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를 죽인 데에는 뚜렷한 동기가 있었다. 「부르제」의 소설 『제자』 속에서도 자기 누이를 자살로 몰아 넣은 「그레루」를 죽인 「앙드레」에도 충분한 까닭이 있었다.
아무리 「라스콜리니코프」가 고뇌의 심연 속에서 헤매었다 해도 독자들은 그의 심중을 빤히 추적해 낼 수 있었다. 「앙드레」의 마음은 더욱 헤아리기 쉽다.
그러나 현대 소설에 이르러서는 분명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무르소」가 왜 「아라비아」인을 죽였는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하물며 그의 마음의 움직임을 헤아릴 수 있는 독자는 드물다.
19일 사형 선고를 받는 순간의 문세광의 표정은 별로 변한 것이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두 손으로 웃도리 끝을 살짝 움켜쥐었다는 것으로 그의 심중의 동요를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자신도 아무 것도 느끼지는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범행 그 자체의 동기도 그 자신이 생각할 만큼 명백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현대의 정치적 암살자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젊은이들이라는 점, 또 하나는 일종의 광신자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단순한 꼭두각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주체적 행동자라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세광도 예외는 아니다. 일본에서 자란 그의 의식은 일본인의 생활 의식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일본 문화를 흔히들 『감각의 문화』라고도 한다. 감각은 자칫하면 사고의 생략을 가져오고 아무 망설임 없이 행동에 치닫게 만든다. 이런 풍토 속에서 그가 설사 1백% 일본인처럼 생활했다 해도 그는 별 수 없이 교포라는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것을 이기기 위해 그는 강대한 조직 속에 끼여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아쉬움을 조총련은 이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그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강령은 감각의 포와가 빚어내는 무감각 속에 젖은 문세광에게도 안성마춤이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아무리 거대한 집단의 힘을 빌린다 해도 결국은 교포란 외톨박이다. 이런 외톨박이 의식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밝히려는 욕구와 겹칠 때 자칫하면 이지러진 영웅주의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이런 것을 조총련은 교묘히 이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은 제2 제3의 문세광이 나올 수 있다는 위험성을 나타내 주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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