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관, 확립이 급선무|새 역사교과서를 보고|박시인<한국고대사학회부회장·서울대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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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단군 기자 등의 시대사를 잘라버리고 세칭 5천년사라고 하던 우리민족의 기록사를 다른 나라의 식민지로서 평양지방에서 시작된 2천년사로 만들어버린 책이 금년부터 국정 국사 교과서로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식민사관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니 개정하라는 언론이 높다.
이에 대하여 문교부 실무진은 몇 해 전에 된 요목에 따라서 교과서를 집필하게 하였더니 그렇게 되었다고 해명하였다. 지난 학년도까지 써온 모든 국사교과서와 함께 그 요목도 식민사관을 제거한다는 문교장관의 발표에 따라서 폐기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폐기된 요목을 되살려서 썼으니 식민사관이 되살아 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집필자중 일부는 시정을 요구하는 성명서와 평가회의 결론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나섰다. 8·15이후 28년이나 답습된 식민사관을 다만 몇 달 동안에 완전히 제거하였다고 보증하는 것인가?
집필자들은 단군 관계기록을 가리켜『신화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라고 부정하였다. 그러나 원본인『삼국유사』를 다시 보아주기 바란다. 「길조선」이란 제목을 붙여서 그것이 실사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 원문은 중국정사를 인용하여 시작하고 중간에 단군을 신격화한 고기를 인용하고 끝으로 또 하나의 사료가 실려있다. 집필자들이 신화라고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이「샌드위치」식으로 중간에 끼여있고 앞뒤에는 중요한 사료가 실려있다.
오늘날 학계의 동향을 보더라도 분명하다. 지난달 26일의 평가회에서도 모든 발언자가 실제 역사임을 강조하였다. 즉 이병훈 박사는 단군 겨레는「알타이」어족이며 그들의 아사달 사회는『삼국유사』에 의하면 평양지방이지만 그 먼저는 산동반도·요동반도 등의 지방이었다고 본다고 발표하였다.
안호상 박사도 부합되는 발표를 하였다. 유봉영 박사는「알타이」「바이칼」지방에서 단군 겨레가 만주·한반도로 오게된 상황과 이동노선을 설명하였다.
유승국 박사는 단군 기록의 연대가 정확함을 입증하는 물적 자료로 은나라 때의 갑골 문을 제시하였다. 평가회에 참석예정이었던 김상기 박사의 검인정국사교과서에도, 이선근 박사의『대한국사』에도 실제역사로서 다루어져있다.
외국학자들의 동향으로 말하면 중국의 동작빈 박사는 단기원년이 서력 기원전 2333년이 정확하다는 연구논문을 내었고 일본의 강산파부 교수의『북「아시아」사』에도 단기가 소개되어있고 미국의「라이샤워」·「페어뱅크」등 교수의 저서에도 단군 시대의 사회풍속이 언급되어 있다.
또 단군 기자시대의 기간을 동사 연표에 있는 그대로 소개하였더니 집필자들은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명한다. 과거의 중요한 기록은 보지 않고 믿지 않으면 사학이 되지 않는다. 「이부작 신이호고」라는 유명한 말이 이런 경우에는 더욱 필요하다.
대야발이 썼다는 유명한 책도 문제의 집필자들은 가짜라고 말한다. 논어·서경·사기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사에 실린 조선왕 기자에 관한 중요한 기록도 그들은 거짓말이라고 간주하고 기자라는 이름조차도 없애버렸음을 첨가해두었다.
이리하여 우리의 기록 사를 반 이상 잘라버리고 2천년 가량밖에 남겨두지 않은 그들은 그 대신에 구석기 시대부터의 출토품을 다루었다고 말하였다. 역사시대가 아닌 구석기 시대와 역사시대의 구별도 무시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역사, 즉 기록사에 관해서 논하고 있다.
또 그들은 민족사관을 세울 방법을 모르겠다고도 말한다. 민족사관을 완전히 확립한다는 것은 물론 오랜 세월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어찌하여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았는가? 우리 겨레가 만주에서 여러 번 파동적으로 중국에 진입하여 왕국을 세웠고 이 반도에서 많이 일본에 이주하여 분국들을 세운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감추지 않고 모아서 기술하면 민족사관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 반면에 우리 조상들은 심한 정파싸움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어린이들의 교과서에 써놓으면 민족사관이 허물어지고 식민사관이 되살아난다.
집필자 중의 어떤 이는 국사교과서를 과학적으로 썼다고 주장하며 애국심을 가지고 국사책을 쓰면 안 된다고 말하였다.
모든 연구는 과학적으로 하여야만 되는 것이나 연구하여 알아낸 사실을 가지고 교과서를 만들 때에는 어떤 것을 선택하여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를 국민교육을 위하는 애국 애족의 마음으로 신중히 검토하여야한다.
만일 국사교과서를 과연 과학적으로 썼다면 애국심은 물론이고 일체의 가치판단을 버리고 기계적, 따라서 맹목적으로 집필하였다는 것이다. 대단히 위험한 책이 되지 않았을까 염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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