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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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닉슨의 화려한 중동 여정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시 클로스업 시키고 있다. 닉슨은 무엇인가 성사할 듯한 무드를 풍겨 주고 있어 주목하게 된다. 사실 중동의 항구적이고 정당한 평화는 이 문제의 해결 없이는 기대하기 힘들다. 닉슨 미국 대통령이나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도 바로 그 점엔 이의가 없는 것 같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약소국들에 교훈 하는 바가 적지 않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낳게 한 직접적인 원인은 제1차 대전에서의 영국의 정책에 있다.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중동 지역은 제1차 대전 때까지 만해도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개전 당시 터키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동맹 관계로 참전, 영국으로 하여금 적대감을 갖게 했다. 영국은 터키를 내부로부터 붕괴시킬 셈으로 1915년 10월 메카의 영주인 후세인에게 전후의 독립을 약속하고 터키에서의 반란을 충동했다. 『맥마혼 서간』이라는 유명한 밀약이었다.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서간 속에는 팔레스타인에 관한 명기 사항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아랍 측은 그후 팔레스타인이 독립 아랍 국가의 약속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고 해석했다.
영국은 약속대로 아랍에 독립을 허가해 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의 유태인들로부터 연합국 측이 전쟁에 협력한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물론 대가가 있는 약속이었다. 1917년 11월 영국 외상 벨푸어는 유태인의 유력자 로드차일드에 보내는 서간 속에서 팔레스타인에 있어서 유태인의 민족적 향토의 건설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고 약속했다. 그것이 문제의 벨푸어 선언이라는 것이다.
영국은 하나의 혀를 가지고 두 가지 약속을 한 셈이 되었다. 팔레스타인 분쟁의 불씨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제1차 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1920년 8월 영국은 결국 대 터키 강화조약에서 맥마혼 서간의 약속을 완전히 무시하고 밸푸어선언의 취지를 살렸다. 영국은 터키 영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잘라 내어 위임 통치를 했다. 그 동안 팔레스타인에의 이민이 활발하게 진행, 아랍인과의 대립은 그칠 날이 없었다. 영국은 2차 대전이 끝나자 그 귀찮은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를 유엔에게 넘겨 버렸다.
유엔은 1947년 11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태 국가로 분할, 유태 국가에 56%, 아랍 국가에서 44%를 주기로 했다. 그러나 인구 분포를 보면 아랍인은 유대인의 두 배에 달하는 1백29만 명이나 되었다. 영토가 불공정하게 갈라진 것이었다. 아랍은 유엔 안을 거부, 문제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한편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자 벤·구리온은 그 자리에서 이스라엘 독립을 선언하고 기어이 국가를 건설했다. 1948년 5윌 14일 밤의 일이다. 아랍 측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 다음날인 15일 팔레스타인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결과는 아랍 참패. 그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쫓겨 나온 난민은 무려 94만 명(아랍연 추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 미국은 아랍에 무엇을 약속할지, 실로 역사적인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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