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황사영 백서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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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1801년 당시 조선 천주교회가 박해받던 상황(辛酉邪獄)과 그에 대한 대책으로 서양의 군사력을 요청하는 내용을 중국 베이징의 가톨릭 주교에게 건의하려다 사전에 발각돼 압수당한 비밀문서다. 흰 비단(가로 62㎝×세로 38㎝)에 썼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부른다.

이 글을 쓴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능지처참 당한 것을 비롯해 1백여명의 천주교도들이 처형되고, 4백여명이 유배당했다. 황사영은 조선 최고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다산 정약용의 조카사위이기도 한데, 다산도 이 사건 때문에 전남 강진으로 유배당했다.

지금부터 2백년 전의 사건이지만 이른바 '황사영 백서'의 역사적 의의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돼 왔다. 시간적 격차를 넘어 오늘 우리 사회 근대화의 명암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시는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 문물이 '서학'이라는 이름하에 변화를 꿈꾸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전파되는 시기였다. 천주교와 서학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학문.신앙 등에 대한 개인의 자유가 국가.민족 등 전체 조직의 질서와 어떻게 충돌했는지를 이 사건은 잘 보여준다.

황사영이 서양의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박해를 막아달라고 요청한 대목 때문에 이 백서는 외세 의존적이며 민족 반역적 사건으로 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신앙의 자유와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는 재해석이 진행되고 있다.

이 서한에서 황사영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으로 요청한 내용은 ▶서양제국의 재정 원조▶베이징 교회와의 긴밀한 연락▶선교사의 조선 입국 허용을 위한 로마 교황의 중국 천자에 대한 협조 서신 발송▶조선 교회의 안정을 위한 조선에 대한 중국의 보호와 간섭▶서양 함대 및 병력의 조선 파견 등이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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