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멈춰가던 8000명, 그를 만난 뒤 새 삶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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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호 22면

캐리커처=미디어카툰 정태권

지난해 5월 심마니 도모(65)씨는 10m만 걸어도 숨이 차서 산은커녕 평지도 걸을 수가 없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로부터 심장 기능이 떨어져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란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들었다. 당장 심장이식 수술이 필요했지만 심장을 제공할 뇌사자도, 시간도 없었다. 하늘이 도왔던 것일까. 주치의가 생명의 끈을 들고 왔다. 미국 ‘소라텍’사가 제조한 인공심장 ‘하트 메이트 Ⅱ’였다. 가슴에 인공심장이 이식됐고 그는 지금은 5㎞를 거뜬히 걷고 실내 자전거도 탄다.

베스트 닥터 <16> 삼성서울병원 흉부외과 이영탁 교수

주치의인 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 흉부외과 이영탁 교수는 “과거의 인공심장이 뇌사자 심장을 받기 전 가교(架橋) 역할을 하는 데 그쳤다면 현재의 인공심장은 그 자체로 치료에 유용하다”면서 “인공심장이 난치성 심장병 환자의 고민을 해결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예상했다.

그는 뇌사자 심장이식이 불가능해서 속절없이 삶의 종착역만 기다리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인공심장 이식을 받게 하기 위해 식품의약품안전처 공무원에게 수시로 e메일을 보낸다.

“우리 병원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1억5000만원에 가까운 수술비 때문에 삶을 접어야 하는 심장병 환자를 위해서 우리나라 전체에서 1년에 10명이라도 인공심장 이식을 받게 해주십시오.”

이 교수는 심장으로 혈액을 공급해주는 심장의 동맥(관상동맥)이 막힌 환자에게 새 혈관을 만들어주는 수술의 권위자다. 지금까지 8000여 명에게 새 삶을 선물했다. 2007년 방영된 MBC 드라마 ‘뉴하트’의 주인공 최강국(조재현 분)의 모델로도 유명하다.

그는 1996년 심장이 뛰는 상태에서 심장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을 만드는 ‘무(無)펌프 심장동맥 우회술’을 국내에 도입했다. 이전엔 일단 심장을 정지시키고 인공심폐기를 돌린 상태에서 수술했는데 새 수술은 뇌졸중과 부정맥 후유증을 뚝 떨어뜨렸다. 수술시간도 1~2시간 단축됐다. 포크의 중간 두 날을 잘라내고 이것으로 혈관의 꿰매는 부분이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켜 시행한 이른바 ‘포크 수술’은 흉부외과의 전설로 남아 있다. 그는 한 해 400명의 심장동맥 환자를 수술하는데 이 가운데 90% 이상을 펌프 없이 수술한다.

이 교수는 98년 심장동맥 우회로를 동맥으로만 만든 수술을 국내 처음으로 성공했다. 동맥과 다리의 정맥을 함께 사용해 우회로를 만든 기존 수술에 비해 정맥을 얻기 위해 다리를 수술할 필요가 없고 혈관이 오래 살아 있는 것이 장점인, 당시로선 획기적인 비약이었다.

2003년 응급순환보조장치(EBS)를 국내 최초로 도입한 것도 이 교수다. 이 기계는 갑자기 심장이나 폐 기능이 멎다시피 한 환자에게 산소를 공급해 한동안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장치다.

그는 수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수술 뒤 환자의 경과를 살피는 것이라고 믿는다. 입원실을 회진(回診)할 때는 가급적 환자의 손을 꼭 잡고 말한다.

“환자의 손을 잡으면 건강 상태를 알 수 있어요. 손이 따뜻하면 심장이 잘 뛰고 피가 잘 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의사의 따뜻한 손길이 환자에게 큰 위안이 되지 않을까요? 저는 환자의 얘기를 들으면서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재충전합니다.”

이 교수는 주말에도 가급적 병원에 나와 환자를 본다. 오후에 약속이 있어도 오전에는 들른다. 후배나 제자 의사가 휴일에 직접 환자를 보지 않고 차트로만 환자를 점검했다간 불호령이 떨어진다.

“흉부외과에 오는 환자는 대부분 자칫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의사의 한순간이 환자에게는 영원이 됩니다. 그래서 잠시라도 방심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늘 후배 의사나 간호사들을 긴장 속으로 몰아넣는 보스와는 거리가 멀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저녁이나 술자리를 갖고 형이나 오빠처럼 팀원들을 토닥거린다. 더러 집에까지 데려와 스트레스와 걱정을 녹이기도 한다. 연말엔 집에 흉부외과 식구들을 초청해서 송년회를 갖는다. 그래서 환자뿐 아니라 제자나 간호사·직원들도 좋아한다. 이 교수는 2004년 삼성서울병원 전공의들 투표를 통해 ‘가장 닮고 싶은 의사’로 선정됐다. 지난해엔 삼성서울병원이 선정하는 ‘올해의 교수상’을 받았다.

‘뉴하트’를 촬영하면서 3개월 동안 이 교수의 일상을 스케치했던 황은경 작가는 그의 팬이 돼 버렸다.

“국내 최고 명의인데도 권위의식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부도 명예도 관심이 없이 늘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오로지 병 고치는 사명감으로 지내는 듯했습니다. 순수함에 감동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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