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과 불교|손경산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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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빚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있듯이 세상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어처구니없는 그림자도 생기게 마련이다. 물질문명의 고도화가 인간을 고아로 만들고, 정신문화의 발달이 인간을 빈약하게 만드는 건, 인간의 무지와 무능력의 소산이 아니라 기지와 폐기의 부산물인 것이다.
무지했던 미개생활을 개발하여 건설된 현대 물질문명의 첨단이라고 자랑하는 서구에 이해하기 곤란한 인간상이 나타나는 건 결코 그들의 무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면서도 현대라는「카테고리」가 인간을 고아로 만들어 존엄성을 짓밟고 있다는 사실 앞에 감각을 잊고 사는게 현대인의 방향의식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서로를 모르는 가운데 자기마저 잊는 일에 능숙해지고 있다. 부모형제는 물론 친구까지도 잊은지 오래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조건 없이 이해하고 사망하던 순수한 얼굴빛을 잃은지 오래다. 인간마다의 가슴속에 수판알이 오르내리는 숨막히는 대인관계가 당연화 되었다. 어머니의 품안에서 내려서면서부터 철조망을 두른 자기만의 세계를 형성하고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의 관계란 처음도 마지막도 조건 위에서만 맺어지게 마련이어서 아름답던 인생의 꿈은 이미 계약 내지는 조건으로 변해가고 있다.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니고 살아야할 인간이 전체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한낱 들러리에 불과하다면 얼마나 서글픈 생이 되고 말겠는가. 「매스·게임」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웅장한 모습은 박수갈채를 받는다지만, 개성이 없이 주어진 주사위를 밝아야하는 개인의 보람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이고 싶어하며 인간은 물론 사회에서도 소외되기를 싫어한다. 그러기에 지적인 사람일수록 자기문제를 고뇌하고, 소외감을 달래기 위해 참여내지는 닮은꼴을 찾는 것이며, 그 무리에 자기를 가누어대기에 게으르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대는 인간에게서 존엄성을 앗아가고, 소외시키며,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전체로서의 인간이기를 유도하고 있기에, 이에서 누적되는 자기에르의 환원과 소외감으로부터의 참여문체를 고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연의 무서운 변화 앞에 무릎을 꿇었던 원시인들처럼. 사회와 현실의「매스」와 소외감과 들러리 같은 조화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는 게 우리들의 예지요.
인간의 투지로 이룩된 현대의 과제인 만큼, 현대인의 종교는 자기의 발견과 개발이 인격완성 접근하고 있는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도 생겨 인간과 자연이 타협을 멀리했다. 인간끼리의 소외감은 인간을 고아와 들러리 인생으로 몰아세우던 부조리를 낳았다. 그러기에 너와 나의 관계를 타협하고자 하며, 자연과의 호흡을 원하는 것이며 끝내는 주객이 없는 대자연에서 외면 당하지 않는 인격자로서의 자기확립을 추구하기에 다다른 것이다.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주객의 분별심에서 오는 고뇌와 부조리를 갈파하시고, 너내와 사물과 우주를 통일하여 오직 주인으로서의 자기를 확립함으로써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다.
인간을「매스」의 대열로 몰아세우려는 현대의 오류 앞에 자산의 주인으로서의 자기를 찾게 하고 영접을 사는 생명 앞에 만인을 용서할 수 있는 자비의 미소를 배우게 하셨으니, 불교야말로 현대인의 고뇌에 가슴 문을 열게 하는 가장 바르고 바른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서로 믿지 못하여 경계하고 싸우는 세계의 사조를 뒤엎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역사로 탈바꿈시키려는 성자의 미소 앞에 존경의 마음을 깔고 우러러보는 눈빛이 뜨겁게 빛나는 위에 불교는 존재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미소 앞에서 현대인은 자기의 인격을 도야하고 주객의 차별의식이 떠난 본연과의 동화작용에서 결코 소외당하지 않는 알찬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에서 우리들 현대인은 현대인의 고뇌에 해탈의 길을 열어 주시고 만물과, 동화하는 깊은 미소를 주신 부처님께, 자아완성의 무거운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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