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문학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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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광숙씨의『거미의 이야기』(월간문학) 는 근래에 보기 드문 수각의 하나가 외지 않을 까 한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초두의 서술부터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웃에서 들려오는 새벽3시를 알리는 시계소리 이후 다시 고요가 엄습해 왔다는 것이다.
미상불 이 작품은 노쇠한 모성의 희생적 생애와 어쩌면 횡사할지도 모르는 비극을 그려주고 있었다.
한 모성은 영웅과 비길수 있으리라. 가난 속에서도 보상을 바라지 않고 어린 자식들을 길러냈으니 영웅이 될 만하다. 그러나 모든 영웅의 말로가 그 랫듯이 노쇠한 모성의 말년은 고독했고, 또 모든 영용에 겐 반드시 배신자가 따르기 마련이었으니 이 모성의 경우에는 성장한 자식들이 배신자가 되고 있었다. 노쇠한 모친을 차마 생매장은 할 수 없어, 이집 저 집으로 번갈아 나르는 소행이 그것이다. 그것이 자식의 도리였다.
이 작품을 특히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인간의 운명과 시간적「리듬」과의 사이엔 유기적 관계가 있다고 하는 기본적 구상(프레임워크)이 돼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어떤 신화와의 대응을 보여주고 있었고 또 그러한 점에서 비극이나「엘레지」의 한 원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가의 거의 원숙에 가까운 기술을 독자는 오래 기억할 줄 안다.
김주영씨의『이장동화』(한국문학) 는 특히 문장이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재미는 작가의「시니시즘」(냉소주의)에서 비롯하고 있는 모양으로 그 가운데『장손이 동화』의 문장은 시종 독자를 긴장시켜 주고 있다. 이 작가는 즐겨「바버리즘」(비어)을 애용하는데 그러나 조금도 혐오감을 유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유의 첫째는 그러한 노악적 문장은 오히려 한국의 실사회-수치감이나「모럴」따위 혹은 예의범절 따위에 아랑곳없이 정녕 본능적으로 만 행동을 하는 선남선녀들을 비평하거나 냉소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의 그러한 문장과 작품의 주제가 조화를 이루고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윤리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작가가 어찌 대상을 비평하거나 냉소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납득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서정인씨의『밤 이야기』(월간중앙) 는 앞의 작품과 대조적이다. 이를테면「앨트루이즘」 (애타주의)이 작품의 기본적 구상이 돼 있는 셈인데, 좀 도둑을 방면해 주는 주요인물의 선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의는 한국의 현대를 살고 있는 독자에게 위선으로밖엔 받아들 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서 작가는 주요인물의 성격을 과장해 보였고, 이를테면 희화화해 보인 것이다.「몰리에르」의 어떤 소극을 연상하게 하는 이 작품 후반부의 처리가 그것인데, 선의를 재확인해 보려는 작가의「휴매니티」와 그것을 전달하려는 소설 작법상의 기술에 대해서 독자는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
신석상씨의『프레·스카드』(월간문학)는 어느 지방신문 사장이 언론을 이용하여 이권을 도모하는 추악한 생태와 농간,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지방관료의 전전긍긍하는 여러 측면을 「하드보일드」한 문장으로 까 보인 작품이다. 「플로트」의 전개에 무리가 없는 가작의 하나가 될 줄 안다. 다만 이러한 사회적 현상(극히 부분적인)을 다루는 데 있어서 그것이 그 부분적인 사회에 주는 영향에 대해 심각한 고려가 선행돼야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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