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흑의 패배가 시작된 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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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본선 16강전> ○김지석 9단 ●판윈러 4단

제8보(88~106)=바둑판 위에선 죽고 사는 게 참으로 잠깐이죠. 흑▲로 절단하자 백은 88로 버리는군요. 좋은 응수법입니다. ‘참고도1’처럼 움직이는 것은 사고를 만드는 거죠. 89로 백 3점이 흑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3점은 새털처럼 가볍군요. 할 일을 다하고 이젠 폐석이 되어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백이 얻은 건 없지 않느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투 중에 둔 백△가 저쪽에서 빛나고 있군요.

 90으로 뻗었을 때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흑이 손을 빼고 91, 93으로 달려간 겁니다. 흑이 초반부터 공들여 쟁취한 백 3점이 이제 거꾸로 흑 6점을 잡고 살아가게 생겼습니다. 백도 바로 잡지 않고 94부터 두는군요. 두 기사가 마치 이쪽을 잊어버린 듯 보입니다. 이곳이 왜 갑자기 외면을 받고 있는 걸까요.

 백 A로 잡으면 11집 생기는군요. 흑이 ‘참고도2’처럼 잡으면 꽤 통통해 보이지만 백 B로 선수로 넘는 뼈아픈 수가 있어서 줄어드는 집을 빼고 나면 고작 6집 정도 늘어납니다. 결국 이곳 크기는 17집 정도군요. ‘한 수에 20집’은 놓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20집이 다른 곳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 가치가 줄어듭니다. 17집은 어떨까요. 91보다 작아 보이고 94보다 발전성이 적어 보이지 않습니까. 판윈러4단은 허망한 심정일 겁니다. 별것도 아닌 이곳에 초반부터 목을 맨 자신이 한스러울 겁니다. 흑의 패배는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봐야 합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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