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신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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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오는4월22일에 있을 일본의 정국(야스꾸니) 신사의 춘계대제는 2차 대전 이후로는 아마도 가장 성대한 것이 될 듯하다.
정국 신사의 전신은 1868년에 생긴 초혼장이다. 여기에 명치유신을 전후한 이른바 순국선열의 충혼들을 모시게 했었다.
이게 1875년에는 동경초혼사라 불리게 되고, 79년부터는 정식으로 정국 신사가 되었다.
본전 안에는 별 것은 없다. 그저 이른바 신검과 신경이 있을 정도이지만 전몰자 약 2백50만명의 관등성명이 적힌 제곤장(위패)이 줄지어 안치되어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그러나 이 신사처럼 한때의 일본인에게 벅찬 감동적 이미지를 안겨준 곳도 없었다.
제곤장에 적힌 2백50만명은 모두 일본의 군인·군속들이다. 더러는 종군간호부와 여자정신대원도 들어있지만…. 이들의 유족들이 해마다 춘·추 두번씩 초혼제때 전국에서 모인다. 천황도 70회나 이곳에 친히 찾아갔었다. 그가 아닌 때에는 반드시 칙사를 보냈다.
이리하여 일본의 전전세대들에게 있어서는 벚꽃과 궁성의 이중교와 정국신사는 한 묶음이 되어 가장 일본적인 것의 상징으로 연상되었다.
그리고 이 복합된 이미지가 안겨주는 것이 바로 군국주의였다. 다른 신사나 신궁과는 달리 정국 신사만은 군부가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를 말해주고 있다.
종전과 함께 맥아더 장군은 이 신사를 민영화시켰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원칙에서였다. 그렇지만 사실은 군국주의의 정신적 지주를 무너뜨리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이런 정국 신사를 다시 국영화시키려는 법안이 지난12일 밤에 일본 의회내각위를 날치기로 통과했다한다. 야당 의원들의 불참리에 이루어진 전격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동 법안이 상정되기는 5년 전부터였으며 일 정부에서는 끈질기게 그 통과를 위해 애써 왔다. 야당쪽에서 이를 군국주의의 부활책동이라 하여 반대해온 것은 물론이다.
최근에 이르러 다시 여당에서 정국신사에 열을 올린 데에는 여러가지 까닭이 있는 듯하다.
종전 후에도 30년 가까이 필리핀에 숨어있던 소야전소위의 귀국 때에는 그 TV중계 때문에 8백50만㎞나 전력소모가 되었다한다.
그렇게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소야전이 귀국직후에 『먼저 정국 신사에 참배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를 정국 신사의 궁사로 모시자는 여론까지 있다. 소야전소위의 생환이 정국신사 붐을 재연시켰다고 볼만도 한 것이다.
또 한 추리는 이렇다. 경제의 번영은 일본서 전후세대를 오히려 타락시켰다. 만약에 이들이 소야전소위와 같은 상황 속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역시 정국 신사가 상징하고 있는 게 제일이라는 복고주의자들의 입김이 세진 것이다.
여기에 또 국민들의 경제적인 불만이 있다. 이를 해소시킬 수 있는 길은 새로운 군국 내셔널리즘밖에 없다고 생각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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