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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목소리 다보스에 울리다 … 고장 난 자본주의 시스템이 답할 차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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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이훈범
국제부장

다보스는 아름다운 곳이다. 녹음의 여름도, 빙설의 겨울도 다 멋지다. 그래도 제철은 겨울이다. 이맘때 최저기온이 영하 5도쯤 된다. 밤마다 함박눈이 내린다. 알프스 계곡에 파묻혀 포근하다. 겨울 스포츠의 낙원인 이유다.

 해마다 그 아름다운 곳, 좋은 계절에 세계에서 가장 힘세고 부자인 사람들이 모인다. 세계경제를 어떻게 끌어가야 할지 의견을 모으기 위해서다. 그런데 올해 뜻밖의 손님이 그곳을 찾았다. 교황의 편지를 지닌 사절이다.

 교황은 힘세고 부자인 사람들에게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호소했다. 경쟁에서 뒤처진 이들과 함께 가야 자본주의가 고귀한 소명에 다다를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라는 경고 아닌 경고도 했다.

 다보스는 아름다운 휴양지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은 곳이다. 가뜩이나 떠받들리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추어주는 분위기 속에선 더욱 그렇다. 과연 교황 얘기에 뜨끔한 사람이 있었을까.

 생각하자니 문득 겹치는 옛 얘기가 있다. 당나라 시인 백낙천이 항저우 자사로 부임해서 당대 고승인 도림선사를 찾았다. ‘새둥지 스님’이라는 별명답게 노송 위에서 좌선하고 있었다. “스님, 나무에서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위험한 건 자넬세.” “저야 높은 벼슬에 두 발을 땅에 딛고 있는데 뭐가 위험합니까?” “티끌 같은 지식으로 교만함만 늘고 번뇌와 탐욕이 쉬지 않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나.”

 샐쭉한 백낙천이 다시 물었다. “불교란 무엇입니까?”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 하라는 거야.” 거창한 법문을 기대했던 백낙천은 실망했다. “그거야 세 살 먹은 아이도 알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돌아서는 백낙천의 뒤통수에 선사의 한마디가 비수처럼 꽂혔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알기는 쉽지만, 팔십 먹은 늙은이도 행하기는 어려우니라.”

 역시 진리란 동서고금, 종교가 따로 없는 법이다. 오늘날 로마 교황의 얘기가 곧 1200년 전 불교 선사가 했던 말 아닌가. 아무리 과학기술의 진보가 세상을 하나로 만들었어도, 아무리 경제사회 시스템이 고도화됐어도 그것을 망치는 건 결국 인간의 탐욕이란 얘기다. 하나 되고 고도화됐기에 탐욕은 더 위험한 게 됐다. 오늘날처럼 힘센 자와 약한 자의 정치적 거리가 가까워지고, 부자와 가난뱅이의 경제적 거리가 멀어진 때가 있었던가. 교황과 선사의 경고가 임계점에 이르고 있다는 말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자본주의는 고장 난 시스템에 대한 자기반성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세계경제 회복세와 함께 옛 분위기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교황 편지에 울림이 있으면 좋으련만, 팔십 노인에게도 어려운 일이 30년 남짓한 모임에는 애초부터 기대난일지도 모르겠다.

이훈범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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