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옴부즈맨 코너] 영혼이 있는 사진 ‘완벽 초상화’ … 언제나 긴 여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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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호 30면

1월 12일자 중앙SUNDAY에는 교학사 국사교과서 채택 반대 운동에 대한 논란이 잘 다뤄졌다. 세계관이나 역사관이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와 다름에 대한 인정과 함께 균형 잡힌 역사교육 실험을 계속할 것이라는 전주 상산고 교장의 인터뷰도 눈길을 끌었다.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기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는 이념 논쟁의 피해자는 결국 학생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힐링 시대 마음의 고전’에서 볼테르는 정형화된 믿음이나 모든 가치 체계에 반대했고 틀릴 수 없는 진리를 내세우는 모든 종류의 이즘(ism)에 반대했다고 한다. 의혹을 품는 게 기분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확신은 터무니없다는 것이다. 글을 읽으면서 볼테르의 관용(Tolerance)에 대한 개념을 국사교과서 논쟁으로, 그 스펙트럼을 넓혀 보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김대식의 Big Questions’는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옥스퍼드대학의 로빈 던바 교수는 영장류 뇌 크기와 집단 크기는 보통 1대1의 연관성이 있어서, 뇌가 클수록 더욱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기억할 수 있기에 더 큰 그룹의 유지가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던바의 수’에 적용해보면 자연적 그룹의 크기는 약 150명이라니, 그럼 페이스북 친구가 150명이 안 되면 크게 반성해야 하나?

우리라는 집단 안에서의 교감과 소통이 끊기면서 홀로 남게 된 인간은 결국엔 조용히 사라져 버리도록 프로그램돼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룹이 개인에게 줄 수 있는 큰 벌 중 하나는 더 이상 우리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평범한 얘기 같지만 한국인은 얼마나 ‘우리’가 되기 위해, 함께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렇지 않음에 불안해했던가. 그런 점에서 ‘우리’라는 개념이야말로 한국 사회 고유의 가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S매거진에 연재되는 ‘권혁재 기자의 不-완벽 초상화’는 독자로서 항상 쉬어가는 코너다. 한참을 바라보게 되는 그의 사진에는 영혼이 있다. 이번 호에는 사이클 국가대표 조호성 선수의 사진이 실렸는데 그의 손 어딘가에 새겨졌다는 ‘스페로 스페라(Spero Spera)’, 숨이 붙어 있는 한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메시지가 그의 눈빛에서 생생하게 읽혀지는 듯싶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올림픽 경기의 고통을 알면서도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유. 그의 사진은 그래서 더 긴 여운을 남기는 것 같다.

몇 쪽에 걸친 예술영재에 대한 조명은 김대진 한국예술영재교육원장의 “영재는 자기가 영재인 줄 몰라야 정상이고, 그래야 무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 한마디로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대한민국에서 영재로 살아가기란 참 어렵다. 너무나 어린 그들에게 붙여진 ‘영재’라는 이름이 무한 상상력의 날개를 꺾지 않길 바랄 뿐이다.



임명옥 코콤포터노벨리 CEO. 이화여대 불문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을 나왔다. 홍보컨설팅, 위기관리 시뮬레이션, 미디어 트레이닝 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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