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화가지망의 처녀 원인 모르게 실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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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날마다 멀어져가는 두 눈에 몸부림치는 여류화가 지망생입니다.
전 69년 대전여고를 졸업, 홍익대미대에 입학한 꿈 많은 소녀였읍니다. 그런데 이듬해 5월 군납업을 하던 아버님이 갑작스럽게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학업도 따라서 중단을 해야했읍니다.
그날 저는 인생이 송두리째 허물어져 내리는 아픔을 씹으며 사랑스런 「캔버스」를 놓았읍니다. 입문 1년만의 「캔버스」와의 별리-. 그것은 정말 견딜 수 없는 시련이었읍니다. 그러나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읍니다. 공부는 뒤에라도 할 수 있는 일, 우선 기울어진 살림을 도와야 했읍니다.
저는 곧장 취직전선에 뛰어들어 미숙한 손끝을 밑천 삼아 세기상사·국제「아트」 등을 전전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화의 배경을 그렸읍니다. 순수예술은 아니었지만 작은 월급이 살림에 보탬이 되는데다가 변해가는 화폭에 보람을 느낄 수도 있어 제 나름대로의 작품활동에 자부심 마저 가질 수 있었읍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작년 9월 어느 날 갑자기 두 눈이 흐려지는 것이 아닙니까. 백방으로 보여본 결과 최근 뇌하수체의 벽이 무너져 내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혹도 생겨 커간다는 청천벽력의 진단입니다.
곧 수술을 않으면 이 혹이 진행 뇌암이 된다는 진단입니다. 저의 눈은 이제 사물의 윤곽은 물론, 흑과 백 어둠과 밝음조차 가릴 수 없읍니다. 수술을 하려도 50만원이나 든다는데 저의 수중에 살림을 도우며 푼푼이 모은 3만원밖에 없읍니다. 붓을 잡을 수 없는 것은 그만두고 저의 손자국이 영롱한 제 그림조차 영영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나 다름없는 저의 눈을 되찾게 해주는 분이 있다면 뼈를 깎는 아픔으로 은혜를 보답하겠읍니다. <서울 성동구 황학동 삼일「아파트」17동211호·박은숙(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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