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58년 전 목숨빚 갚으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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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패전(敗戰) 후 한국인의 보살핌으로 살아 남아 일본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던 한 관동군 간부의 약속이 한.일 양국의 사회지도층의 후원 아래 아들에 의해 58년만에 결실을 보게 돼 현해탄 양안에 울림을 주고 있다.

지난 15일 오후 8시쯤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세칭 '쟁이골'. 마을로부터 떨어져 산속에 자리잡은 이곳이 모처럼 모여든 1백여명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들은 '화쟁사(和諍寺)건립을 지원하는 한국인들의 모임'을 결성키 위해 참석한 사람들로 문용린(文龍鱗) 전 교육부장관.장만기(張萬基)인간개발연구원회장.이시형(李時炯)박사.손광운(孫光雲)변호사.피아니스트 임동창(林東窓).김종욱(金鍾郁)우리은행 수석부행장 등 각계에서 내로라 하는 인사들.

이날 결성식에 앞서 1시간30여분간 벌어진 사물놀이와 판소리 등 앞풀이 행사에선 내내 유난히 흥겨워하면서도 눈시울을 붉히는 한 일본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이날 모임을 있게 한 가토 다다시(加藤正.79년 67세로 사망)의 장남 가토 미쓰오(加藤三雄.62)였다.

화쟁사는 가토가 일제에 의해 희생된 한국인들의 유골을 수습해 원혼을 천도하기 위해 사재 20여억원을 털어 나고야에 건립을 추진 중인 절 이름으로 선친의 평생 염원이자 유언을 받드는 효(孝)사업이다.

가토 부자가 이같은 결심을 하게 된 것은 1945년 일제가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일본으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한국인과 맺은 인연 때문.

관동군 대위로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아버지 가토는 퇴각당시 병에 걸려 낙오되는 바람에 민간인으로 위장한 채 아내와 여섯 살짜리 장남을 인솔, 가까스로 기차를 얻어 타고 평양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행 배를 타기 위해 원산에 도착해보니 배편은 이미 끊어진 뒤였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나중에 아버지한테 들은 얘깁니다만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민가를 찾아갔답니다. 집주인이 김씨라는 사람이었다는데 '전쟁이 웬수지 사람이 무슨 죄냐'며 남몰래 석달 동안이나 먹이고 재운 것은 물론 배편까지 잡아줬답니다."

김씨 덕분에 천신만고 끝에 고향인 나고야 아이치(愛知)현에 돌아간 뒤 가토는 애자(碍子)공장을 차렸다. 전후 복구사업이 한창이라 장사가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시도 김씨를 잊은 적이 없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초조해 하던 그는 한국인 이웃으로부터 일본에서 희생된 채 방치되고 있는 원혼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이들의 해원(解寃)이야말로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유골을 수습해 모시고 극락으로 천도해주는 절을 짓자-. 그제야 가족들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장남 미쓰오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하지만 그는 마을 뒤 용두산 자락에 터까지 물색해놓고 자금마련을 위해 사업에 매달리던 중 79년 갑작스런 병으로 절 짓는 일을 유업으로 남긴 채 타계하고 말았다.

엉겁결에 회사를 물려받은 장남 미쓰오는 회사 일에 몰두하느라 93년에야 선친의 유업을 실행키로 맘먹고 유산을 정리해 절 터 2천평(일본 내 후원회가 최근 7백평을 더 샀다)을 사들이고 법인을 만들었다.

하지만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돈이 엄청나게 소요되는데다 까다로운 일이 많아 진척이 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성금을 모으기로 하고 99년 당시 주니치 드래곤즈의 오오고시 간지(大越貫司)회장을 앞세워 '화쟁사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어려워진 일본 경제가 발목을 잡았다.

"잡아놓은 터가 신공항 예정지 인근이라 호텔용지로 팔라는 유혹도 계속됐지만 아버지의 뜻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같은 사실이 한국에 알려진 건 이 무렵. 도자기엑스포 홍보를 위해 나고야를 들렀던 김영림(金英琳.65.여)도예협회이사가 오오고시 회장으로부터 전말을 듣고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태평로모임'에 보고한 것.

각계의 지도층 인사들로 구성된 이 모임에선 2001년말 가토 미쓰오에게 '우리는 당신과 함께 합니다'란 이름의 상패를 수여하고 후원키로 했다.

이들은 일본의 '가토돕기모임'과 더불어 1차로 50억원 규모의 금당(金堂)을 내년 안에 준공토록 활동을 펴나갈 계획이다. 주지를 한국인으로 하는 것은 물론 모든 자재를 한국산으로 하고 경내에 객사를 겸한 연수원을 마련, 양국간 문화교류의 장으로 만들 계획이다.

이날 결성식에서 공동대표로 선임된 강석진(姜錫珍)태평로모임 대표는 "화쟁사 건립은 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인끼리의 협력을 통한 진정한 한.일간 화해를 보여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들은 다음달 6일 있을 기공식에 80여명이 '문화사절단'으로 참석할 예정이다. 연락처 031-878-4090

이만훈사회전문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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