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제8화 포로 학자 정희득의 우수-(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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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오까야마」남쪽 「우노」항에서 「페리」에 올랐다.
「세도나이까이」를 지나 「시고꾸」「다까마쓰」로 왕래하는 「페리」다.
아침나절엔 맑던 날씨가 오후에 접어들자 구름이 끼더니 이내 실같은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노」항엔 지금 우리 나라 활선어 운반선이 하루에도 20여척이나 드나들어 싱싱한 생선을 부둣가에 부린다. 수출 장려로 국내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생선이 이곳을 통해 일본 사람들의 미각을 자극하는 것이다.
「다까마쓰」로 향하는 「페리·터미널」근처에도 우리 나라 화물선이 2척이나 정박해 있었다.
이곳에 부려진 생선들은 냉동차로 동경·대판·경도 등에 직송된다는 이야기다.
「세도나이까이」는 안개 속에 진회색으로 덮여 있었다.
「페리」 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경치도 뿌연 우수를 자아낸다.
「페리」는 안개비 속을 가르면서 조용히 미끄러져 나간다.
일본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세도나이까이」연안의 풍광명미한 경치도 모두 짙은 쥐색으로 변해 그 빛을 잃고 있다.

<아내·누이 등 투신자살>
정유재란 때 이곳 「시고꾸」 「도꾸시마」에 포로로 잡혀 왔던 유학자 정희득의 유적을 찾아가는 길이다.
정희득은 1657년(선조30년)왜군이 재침했던 바로 그해 9월 27일 전라도 영광군 칠산도 근처 바다위에서 왜군에 붙잡혀 왔었다.
원래 경상도 진주 함평 고을 사람으로 자는 여길, 호는 월봉이며 그때 나이 25세의 청년 유학자로 「도꾸시마」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높은 학식과 식견으로 일본 사람들로부터 숭상 받아 많은 지기를 얻었다.
기실 정희득 일가는 경상남도 창원이 왜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자, 난을 피하기 위해 9월 15일 구수포에서 배를 타고 서해로 떠난 듯 싶다.
다도해를 지나면서 연일 풍파에 시달렸으며 26일에야 겨우 순풍을 만나 안마도를 향하던 중 27일 칠산도 근처 바다에서 결국 왜군에 잡힌 것이다.
왜군에 잡히자 어머니 이씨, 형수 박씨, 처 이씨, 누이 정씨 등 네명의 여인은 욕을 당할 것이 두려워 바닷물에 몸을 던져 모두 숨지고 말았다.
그를 붙잡은 것은 「도꾸시마」성주 「하찌스가·이에마사」의 막하부장 삼소칠낭, 그에게 끌려서 「도꾸시마」까지 포로로 오게 되었다.
그는 포로 생활 11개월 동안 일기를 써서 유명한 『월봉해상록』이란 책을 남겼다.
임진란과 정유재란을 통해 많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볼모로 붙잡혀 갔으나 포로 생활을 글로 써서 남긴 것은 이 정희득의 『월봉해상록』과 애원현대주에 끌려왔던 주자 학자 강항의 『간양록』 정도로 꼽혀진다.

<6대손 정간이 간행>
『월봉해상록』은 처음 정희득이 썼을 때는 『만사록』이란 제목의 글. 책으로도 인쇄되지 못하고 집안 대대로 습장되어 내려오다 1723년 증손 정덕림이 벌레 먹은 책장을 보수, 『해상록』이라고 제목을 바꾸어 간행하려다 역시 실현을 보지 못했다.
그 후 1786년 6대손 정간의 노력으로 책을 쓴 지 1백60여년 후에야 겨우 빛을 보게 되었다. 상·하 2권으로 1백질을 목활자로 간행, 도내 사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정희득은 사실 향리의 선비 유학자로 생존 당시에는 별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백87년전 정조 10년에 자손의 힘으로 간행된 이 『월봉해상록』으로 새삼 그의 높은 학식과 식견을 엿보게 한다.
정희득 일가를 붙잡은 왜군은 배까지 빼앗아 진도 앞바다까지 끌고 갔다.
『진도 앞바다에는 이렇게 잡혀 온 배가 수십척으로 신음과 탄식 소리가 바다위를 덮고 있다』고 정은 일기에서 쓰고 있다.
10월 14일, 한 작은 섬에 도착했는데 그곳이 바로 삼소칠랑의 본진으로 그곳에서 정은 유중원·이중희 등이 처자와 함께 붙잡혀 와 있는 것을 만났다.
10월 17일에는 다시 떠났던 곳 가까이 되끌려왔는데 해변가에서 왜군이 축성 공사를 서두르는 것을 보았다.
왜군들은 북을 울리며 인부들을 독려, 성을 쌓고 있었다.
11월 22일 작은 배 하나를 훔쳐 도망치려 했으나 감시병에게 들켜 마침내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26일이 되자, 포로들을 전부 일본에 데려 가기로 방침이 선 듯, 배에 1백 여명을 태우고 우리 나라를 떠났다.

<복취사 자주 찾은 월봉>
29일 밤 대마도에 도착했다.
풍파가 일어 7일간을 머무르고 다시 항해를 계속, 「이끼시마」를 통과, 「나가또」·「시모노세끼」 등을 거쳐 「세도나이까이」를 통과했다.
대마도를 떠난 지 1개월이 지난 12월말 겨우 「도꾸시마」에 닿았다.
야밤중에 배에서 내린 정희득은 「하찌스가」의 일개 병졸집에 갇힌 몸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페리」는 「세도나이까이」를 동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건너간다. 바로 3백76년전에 정희득 등 1백 여명의 우리 나라 사람들이 억울하게 끌려갔던 그 바다를 곧바로 질러가는 것이다.
「우노」에서 배를 탄지 1시간만에「페리」는 「다까마쓰」에 승객을 부려 놓았다.
우중충한 부두.
날이 저문 부둣가. 가로등이 안개 비속에 더한 층 처량하기만 했다.
이곳에서 정희득이 포로 생활을 보낸 「도꾸시마」까지는 육로로 2백여리.
「시고꾸」지방 한국교육문화 「센터」소장 박철우씨의 안내로 「다까마스」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날이 밝으면 정희득이 「도꾸시마」에서 즐겨 찾았다는 복취사를 찾아가야 한다.
낯선 땅, 우울한 밤비 속, 저 멀리 대나무처럼 굽힐 줄 모르고 꼿꼿하기만 했던 청년 유학자 정희득의 환영이 아련히 떠오르는 듯 했다. <계속>

<차례>
제2장 일본 속에 맺힌 한인들의 원한
제5화 북해도 한인 위령탑 「엘레지」
제6화 가등청정의 볼모 일요상인 서간
제7화 신율도의 성녀 「오다·줄리아」
제8화 포로 학자 정희득의 우수
제9화 고균 김옥균의 유량 행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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