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식되는 고려금속활자본-『고문진보대전』공개 계기로 살펴본 「최고의 기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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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손보기박사(연세대박물관장)가 30일 고려중기간 『고문진보대전』을 공개함으로써 고려금속활자 인쇄본에 관한 보다 새로운 인식이 다시 제기되었다.

<『상정예문』 현존본 없어>
손 박사는 30일 하오 연세대 동방학연구소가 주최한 제7회 실학공개강좌에서 『실학방법에 의한 인쇄기술의 연구-고려중기 간본「고문진보」에 대하여』를 발표, 이 책이 1170년 전후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세제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고 주장해 새로운 논의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지금까지 고려의 금속활자본의 인쇄가 시작된 것은 1234년간의 『상정고금예문』으로 알려졌으며, 이 책의 현존본이 없기 때문에 고려금속활자 인쇄의 역사자체에 의혹을 갖는 사람조차 있었다.
그러나 고려주자본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1239년에 목판에 다시 옮겼다는 기록에
따라 고려시대의 금속활자인쇄 가능성은 늘 지적되곤 했다.
그러다가 근년 「파리」국립도서관 소장의 『백운화상초록 직지심체요절』이 1377년 우왕 3년간인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임이 밝혀지자 고려주자 인쇄기술이 새삼 주목되었으며, 이보다 앞서는 국내소장의 금속활자 인쇄본을 찾으려는 노력이 뒤따랐다.
그리하여 지난번 고려대 도서관이 소장한 『청량태순종심요법문』이 충렬왕 23년∼24년(1297년∼1298년)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이라고 주장되었던 것이다.

<서적점은 l050연께>
이같은 고려금속활자본의 출현과 관련해서 그 기원이 논의됐다.
가령 어떤 이는 『고려사절요』공양왕 4년 임신(1392년) 정월 초의 기사, 측 『서적원을 처음 설치하고 주자인 서적을 관할했다』는 기록 때문에 1392년 설을 주장했으며, 어떤 이는 고주지법이 숙종7년 즉 1102년에 시제됐다는 것으로 해서 그 직후가 아닌가 보고 있다.
윤병태씨(고려대 도서관 사서)는 『고려사』의 기록 『서적점…공양왕삼년파 사년치 서적원장주자인서적유령승』을 공양왕 때 서적원을 설치하고 주자를 관장한 것이 아니라 문종 때부터 서적점이 주자를 관장한 것으로 해석, 1047년∼83년께에 금속활자가 기원했다고 봤다.
물론 성종15년(996년)「주철전」의 기록으로 미뤄 주자기술의 개척·발전을 예측케 하는 것이다.

<『심요법문』은 백20년 뒤>
따라서 이번 공개된 『고문진보대전』은 『상정례문』으로부터 70년 정도, 『직지심체요절』로부터 2백년 가량, 『심요법문』으로부터 1백20년 가량 앞서는 것이지만 윤씨가 주장하는 금속활자 기원 때로부터는 1백20여년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금속활자본의 진위는 서지학적인 연구를 통해 추정되었으나 활자인쇄기술사면에서 활자를 부어서 만들어 그로써 판을 짜서 찍어내기까지의 기술과정을 실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손 박사는 이번 발표를 위해 실학정신에 의한 실제의 실험도 거쳤다.
서지학적으로 『고문진보』는 판식이 남송 초의 형태를 지닌 것이며 활자가 고려후기의 송설체보다 오랜 육조체이며 주조기술도 금속활자 초창기인 고려중기의 특성을 갖추고 있으며 고자 자체의 크기와 줄이 고르지 않은 것 등으로 고려중기임이 지적되었다.
이같은 발표는 학계의 세밀한 검토와 손 박사 자신에 의한 국제학계 소개 및 공인의 단계를 거처야 할 것이지만 아뭏든 새로운 고려금속활자인쇄본의 발굴은 한국문화의 선양·개발을 위해 반가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공종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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