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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연극, 통치를 탐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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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최형규
최형규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최형규
베이징 총국장

지난해 12월 30일 밤, 한국의 국립극장에 해당하는 베이징 국가대극원에 중국 지도부 100여 명이 모였다. 시진핑 국가주석 등 정치국 상무위원 7명 전원, 정치국원, 당 중앙서기처 서기, 부총리급의 국무위원 등. 무슨 국가대사를 논의하자고 만난 게 아니다. 갑오년 새해를 앞두고 연극 몇 편 보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자는 자리다.

사실 처음이 아니고 2007년 이래 7년째 계속되는 연례행사다. 지도부는 모두 노 타이 차림이었고 얼굴은 환했다. 모처럼 골치 아픈 국사를 잠깐이나마 제쳐놓을 수 있다는 게 어딘가. 한데 이 편안한 분위기에도 중국식 통치 코드는 숨어 있다.

 우선 무대에 오른 작품이 예년과 달랐다. 지난해까지 공연작품은 베이징 중심으로 발전된 경극(京劇) 하나였다. 중국을 대표하는 연극이고 베이징이 권력의 중심이라는 상징성이 더해진 결과였다.

그러나 이번엔 경극은 물론이고 산둥(山東)성의 여극(呂劇), 산시(山西)성의 진극(晋劇), 쓰촨(四川)성의 천극(川劇) 등 모두 12개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전통문화의 공간적 벽을 허물고 그 다양성을 추구하겠다는 신호다. 중국 문화의 백화제방 예고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진핑 주석이 지난해 말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曲阜)에 들러 ‘전통문화의 창조적 현대화’를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날 공연된 작품의 내용 역시 시진핑의 통치 코드를 반영했다. 공평과 정의, 반부패를 외치는 작품이 그렇다. 여기에 효와 남녀 간 사랑을 논하는 작품도 곁들여 비정치적 채색도 했다.

이 모든 작품의 연출은 거장 장이머우 감독이 맡았다. 최근 초과 자녀 문제로 거액의 벌금을 내야 할 처지에 처한 그에게 이 같은 연출을 맡기는 걸 보면 범법과 예술적 탁월성을 구분하는 묘한 화해도 느껴진다. 무극(武劇)이 흥을 돋우지 않은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창과 칼·활을 쓰는 무술극이 먼저 관람객들의 전투의지를 북돋고 공연이 시작됐다. 혁명의지를 잊지 말자는 지도부의 다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러 가지 잡기가 이를 대신했다. 투쟁보다는 화합을, 경직보다는 유연을 추구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자신감이 묻어나오는 대목이다. 처음으로 혁명 원로들을 공연장에 초청하지 않은 것은 원로정치가 더 이상 중국 권력의 한 축을 이뤄서는 안 된다는 대국민 선언적 의미가 있다 할 수 있겠다. 편안하게 극을 감상하면서도 국민에게 새해 메시지는 다 전하는 중국식 문화 통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도 연초에 함께 연극이든 영화든 좀 보시면 어떨까. ‘이순신’도 좋고 ‘태극기 휘날리며’도 좋다. 그래야 갑오년 새해 한국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돌아보기라도 할 것 아닌가. 그것도 싫으면 코미디 한 편이라도 보시든가. 함께 웃기라도 해야 덜 싸울 것 아닌가.

최형규 베이징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