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조류보호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시린 하늘과 소슬바람. 그리고 조금쯤은 빽빽한 소나무. 명승고적도 없어 마냥 심심하고 사람이나 실컷 봤으면 하는 산골.
오늘도 가파른 산꼭대기를 오른다. 고추밭엘 도착하면 기진맥진이다.
『오늘도 꿩 떼가 몰려 왔겠지』라고 생각하며 밭에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고추포기 사이사이에서 놀랄만큼 큰소리를 내며 수없이 날아간다. 고추를 딴다. 두 개 중 한 개는 꼭꼭 꿩이 쪼아 못쓰게 돼있다.
이것을 보면 보살님이라 해도 울화가 치밀 것이다. 허수아비를 세워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배짱이 좋다. 콩 씨를 갈면 다 파헤치고 싹이 트면 노루가 끊어 먹고. 야생조류보호법이 생기고 나서는 공기총 소리도 사라지고 급작스럽게 불어나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래도 법은 무서워 누구하나 손대는 이가 없다.
풍부한 자연 속에 사는 것도 좋지만 항상 먹고살기에 바쁜 우리네에겐 이런 게 문제가 아니다. 요즘은 낮에도 노루가 마을에 나타난다고 나 혼자 놀라 하지만, 그러나 얼마나 많은 곡식을 헤치고 다니는지 그 누가 알까? 손수 뿌린 씨앗. 가슴아파 하는게 어쩌면 당연한 지도 모른다. 이 고장 특산물인 고추는 가을을 풍성하게 해주며 벼르기만 하던 사고싶은 것에 대한 엄청난 욕구를 조금쯤은 채워준다. 그러나 추석빔과 운동회며…손을 꼽아도 아득하며 비누한강 80원에 말린 고추는 상품1근에 겨우2백50원. 손수 가꾼 곡식을 거둘 때의 보람을 위해 가을을 기다리며 긴 봄, 긴 여름을 기를 쓰며 살아온 우리네에게 한갓 야생 조가 꿈을 뺏을 줄이야.
하긴 이런 「우선 하고 보자」는 주의가 곱던 산천을 황폐하게 만들고 새 한 마리 발붙일 곳을 없게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헐값의 고추를 팔며 성한 것 보다 못쓰는 게 더 많은 것을 보는 허무한 마음을 세상 그 누가 헤아리기나 할까. 얼른 한시름 놓을 기발한 대책을 당국이 세워주기를 바라며 부모님들의 요즘 걱정을 덜어드리고 싶다. (이름·주소를 알려주십시오) <편집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