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 대표회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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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노래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묘소를 찾아본 일이 있다. 대구 근교 화원, 그야말로 황량한 들에 선 조들과 함께 묻혀 있었다.
묘소에 들어서면 비석 하나가 우뚝 서있다. 풍상이 어른거리는 비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절목」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무슨 요 목이 적혀있는 것이다.
첫째, 대상이 지나면 기제를 삼가고 춘추의 시제만 지낸다. 둘째, 제수는 간소하게 무엇·무엇만으로 차린다. 셋째, 묘지는 종손이 관리하되, 그가 불초 생이면 그 대신 누가 관리를 한다…등의 내용이다. 묘지 한가운데는 제각이 있어서 여기서 시제를 공동으로 지내게 했다. 이것은 선조의 유지를 받든, 말하자면 그 가문의 제례인 셈이다.
요즘 정부당국은 추석절을 앞두고 전국의 문중대표를 소집한일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개정「가정의례준칙」을 놓고 간소한 제례를 설득한 모양이다. 그 후문이 어느 TV의 좌담에 방영된 것을 보았다. 문중들을 대표한 분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격론을 벌였다. 그것은 획일적으로 생략하거나 간소하게만 할 의례는 아니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간소론」을 편 입장이 몹시 난처하게 면박을 당하는 광경까지 불 수 있었다.
새삼 장황한 옛날의 제례를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 문제야말로 관료적인 사고가 쉽게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것은 다분히 전통과 풍습을 존중하는 인본주의(휴머니즘)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성묘는 제수를 차리지 않고 묵념이나 설로 대신한다는 조목은 관제의 준칙만으로 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권고는 될 수 있어도 지시, 또는 명령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조선을 흠모하고 기리는 미덕을 오랜 역사를 두고 간직해온 민족이 하루아침에 그것에 관련된 의식을 걷어치울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엔 그것이 어떤 죄의식으로까지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엔 성씨가 무려 2백50여 가지나 있다. 이들을 본관으로 나누면 문중은 무려 1만의 수에 가깝다. 모든 제례는 그 많은 가문마다 전래로 존중하는 법이 따로 있을 수 있다. 가풍이란 바로 이런 표현들의 하나이기도 하다. 한편 이것은 그 가문의 긍지와도 통한다. 어디까지나 가문의 문제인 것이다.
이상적(?)이기는 그런 문제를 가문의 양식과 분수에 맡겨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가문도 있을 수 있고, 저런 가문도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문중대표들이 난데없이 소집된 회의에서 당혹과 회의를 자아낸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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