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를 틀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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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머리를 내어 두르며 바람을 일으키는 선풍기의 소음이 이처럼 정답게 느껴질 수가 없다. 꿈 속 아기천사의 작은 날개처럼 신비하기 조차하다. 어머님의 얼굴이 한결 밝아진 듯 보인다.
시어머님을 모시게 된지 8개월. 첫해 겨울은 불효스럽긴 했어도 그런대로 별일 없이 모실 수 있었지만 옹색한 살림살이엔 추운 겨울 못지 않게 여름도 역겨운 것이다. 그래서 초여름부터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며 선풍기 값을 물어보곤 하였다.
그러나 우리살림에 그렇게 큰돈을 떼어낸다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하루하루 더워질수록 어머님의 얼굴을 대하기가 민망스러웠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밖에서 시달리는 그이에게 이런 일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내 힘으로 선풍기를 마련해 보리라 마음을 다졌다.
그러나 살림이라는 것이 이 주부초년생에겐 너무나 어려워 보였고 하루 몇10원을 꼬박꼬박 모은다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깐 비치는 듯하던 장마기운도 멀리간 듯 하더니 더위는 더욱 기승을 떨고 있는데 지금까지 저금통에 모아진 돈은 고작 3천원. 5천원이라도 모이면 월부로라도 들여다놓으려고 했었지만 내 마음은 초조하기만 했다.
벌써 7월이 다 가는데…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바로 어제저녁 그이가 나의 키만큼이나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선풍기였다.
회사로 찾아온 외무사원한테서 월부로 구입한 것이라고 했다. 눈물이 핑 돌만큼 너무나 고마왔다.
지금껏 그처럼 애써 모은 이 돈으론 이 남은 여름동안 어머님 좋아하시는 과일들이나 듬뿍 사드려야겠다고 생각하니 더없이 마음이 즐겁다.
『어머니, 그 동안 더위에 고생하셨죠?』
한껏 밝아진 며느리의 말에 잡지를 읽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얼굴을 돌리시곤 빙그레 웃으신다. 【유승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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