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SK수사 외압시비 가려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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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영삼 정권이 캐낸 이전 정부의 스캔들 중에 '율곡사업'비리가 있다. 군(軍)전력 증강을 위한 초대형 무기 도입 사업의 추태가 감사원의 감사에서 드러난 것이다.

전직 국방부장관과 공군.해군참모총장 등 거물들이 줄줄이 검찰에 구속되고,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서면조사를 놓고도 시끄러웠던 사건.

무기상.군수산업체.군이 얽히고, 중간에 거액이 증발하는 '배달사고'도 춤췄던 비리 종합판이었다. 이어 안기부의 남북 고위급 회담 훈령 조작사건에 감사원이 칼을 빼들면서 이런 일이 있었다.

당대의 파워맨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이 민감한 사안에 대해 사정기관끼리 사전조율을 하자고 제안했다. 감사원.안기부.청와대 민정.검찰이 먼저 협의를 하자는 것.

그러나 감사원은 거부했다. "감사기관이 피감기관과 무슨 조율이냐"는 게 이유였다. 법적으로 감사원의 직무감사를 받는 기관들과 그런 식의 관계는 옳지 않다는 거였다.

'오만한 감사원'이란 뒷말이 따랐다. 하지만 감사원의 그런 외고집이 없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과연 '율곡'이나 '훈령조작 사건'의 실체가 그렇게 까발려질 수 있었을까.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긴 적절치 않지만 지금 우려되는 일이 하나 터져 있다.

최근 검찰의 SK그룹 수사에의 외압 논란이다. 지난 일요일 대통령과 평검사 간 토론회에서 한 검사가 폭로하며 알려졌다. 수사 중인 검찰에 여당 사무총장과 재경부장관.금감위원장이 뭔가 주문을 했던 것이다.

이틀 뒤 청와대는 "경제에 미칠 파장을 걱정해 수사발표 시기를 늦춰달라고 했다"고 자체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수사에는 영향을 주지 않은 정책적 조율이었다는 거다.

하지만 수사팀쪽 얘기는 다르다. 폭로검사는 "외부로부터 압력을 받았다"고 했다. "거기서 밀리면 정치검사가 되는 것"이라고도 했다. 이렇게 검사는 '외압'으로 느꼈고, 청와대는 '조율'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반드시 따지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도대체 여당 사무총장이 언제 그렇게 국가경제를 걱정할 위치였던가. 그가 검찰에 얘기한 '무리한 수술은 환자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은 국가보다는 수사받는 기업을 걱정한 게 아닐까.

재경부와 금감위의 개입도 개운치는 않다. 두 기관은 기업과 업무로 연결이 되는 곳이다. 따라서 언제든 '잠재적 피의자'가 될 수도 있는 곳이다.

우리에게 정부기관과 기업과의 유착 비리가 어디 어제.오늘 일인가. 율곡비리를 캐던 1993년의 감사원이었다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했을까 궁금하다.

지난해 초 검찰 수뇌부는 '이용호 게이트' 수사 진행 상황을 권력 실세에게 알려줬다는 의혹에 시달렸다. 검찰총장과 다른 고위 간부가 한동안 중죄인 취급을 받다가 끝내 명예에 먹칠을 당했다.

이번의 SK수사 상황을 여당 사무총장이나 재경부장관.금감위원장은 어떤 경로로 알았을까. 어떤 형태였든 이 또한 수사 기밀 유출은 아니었나.

혹시 하나는 정권 말기, 하나는 정권 초기의 일이라서 비슷한 경우임에도 '대접'이 달라진다면 그 또한 문제다.

이번 일을 겪으며 젊은 검사들은 앞으로 수사 관련 청탁자들의 신상을 공개하기로 했다. 내부 통신망에 '청탁 게시판'도 만들겠다고 했다. 검찰사(史)에 남을 파동이 정돈을 기다리며 계속되고 있다.

김석현 사건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