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에세이] 직장과 바꾼 名酒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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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지난해 7월 런던의 금융가는 물론 세계의 와인 애호가들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런던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페트뤼스'에서 바클레이즈 캐피털의 직원 여섯 명이 채권시장에서 성공적인 거래를 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저녁모임을 가진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그때 그들이 마신 와인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와인 값이 담긴 계산서 내역은 다음과 같다. 1982년도 몽랏쇠(화이트 와인) 1천4백파운드, 1945년도 샤토 페트뤼스 1만1천6백파운드, 1946년도 샤토 페트뤼스 9천4백파운드, 1947년도 샤토 페트뤼스 1만2천3백파운드, 1900년도 샤토 디킴(화이트 와인) 9천2백파운드 등 도합 4만3천9백파운드였다.

레드 와인 세 병에 화이트 와인 두 병을 합쳐 다섯 병의 와인 값이 우리나라 돈으로 8천3백41만원이나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게 되자 제일 먼저 바클레이즈 캐피털의 고객들이 항의하고 나섰다.

회사 경영층은 즉각 철저한 조사에 착수했고, 그 결과 와인 사건에 연루된 직원 여섯 명 중 다섯 명을 해고했다. 나머지 한 명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한편 페트뤼스 레스토랑 측은 그날 바클레이즈 캐피털 직원들의 고급 와인 주문에 감격한 나머지 정작 저녁식사 값은 받지 않았다는데 식사 값은 4백파운드(약 76만원)로 와인 값에는 턱없이 못 미쳤다.

이 유명한 와인 사건의 배경이 된 런던의 레스토랑 이름인 페트뤼스(Petrus)는 보르도의 포므롤(Pomerol)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 중 가장 높게 평가받는 와인의 이름이기도 하다.

보르도의 메독 지역에서는 와인을 만들 때 포도 종류 중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로 사용하면서 메를로를 일부 혼합하는 데 비해, 포므롤 지역에선 주로 메를로(Merlot)를 사용하고 카베르네 프랑을 일부 섞거나 소량의 카베르네 소비뇽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위 사건에서 문제가 된 샤토 페트뤼스는 포므롤의 제왕답게 메를로를 95~1백% 사용한다.

평균 수령(樹齡)이 70년 된 포도나무와 그 나무가 위치하는 언덕 특유의 토질에서 탄생한 와인은 숙성된 후에도 과실맛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밝고 진한 루비색조를 지니고 있다.

또 새 나무통만이 줄 수 있는 풍미(風味)와 농후한 타닌 성분을 느끼게 하는 힘찬 와인이기도 하다.

1889년 파리세계박람회에 출품된 샤토 페트뤼스는 뛰어난 품질로 금상의 영광을 차지함으로써 포므롤 지역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포므롤에서는 아직도 공식적인 자격부여제도가 실시되지 않고 있다. 정부에 의한 평가보다도 시장에서 받는 고객의 평가에 더 무게를 두겠다는 자세를 고수하는 것이다.

보르도의 최상급 레드 와인으로는 전통적으로 메독 지역의 라핏트 롯실드, 라투르, 마고, 무통 롯실드와 그라브 지역의 오부리옹, 생테밀리옹 지역의 오존과 슈발 블랑, 포므롤 지역의 페트뤼스 등 여덟 개를 꼽는다.

그 가운데 샤토 페트뤼스는 1970년대에 이미 여덟개 샤토 중 최고가로 거래돼 명실공히 보르도의 제왕 자리에 올랐다. 아까운 것은 연간 생산규모가 4천~4천5백 상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맛볼 수 없는 와인이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그날 바클레이즈 캐피털의 직원들이 마신 와인 가운데 샤토 페트뤼스 1945년산과 1947년산은 20세기 최고의 레드 와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와인 애호가들에겐 꿈과 같은 와인이다.

그들이 비록 저녁식사 한끼에 거금을 낭비했다는 죄로 회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됐지만 부러워하는 이들도 있는 건 그래서다.

김명호 한국은행 전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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