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아빠가 집에 있는 일요일은 내게 있어 오히려 더 분주하고 정신없는 날이다. 그의 늦잠덕분에 아침식사가 늦어지고 그에따른 설거지· 집안청소· 빨래등 모든 것이 지연되는 것이다.
아직 빨래가 남아 있는데, 아빠는 차마 미안해서 부탁은 못하고 은근히 내눈치만 살피더니 거울 앞에서 혼자 말처럼『야, 이거 시내 나갔다간 여지없이 장발족으로 몰리겠는데.』
오늘 꼭 이발을 해야겠다는 다짐인 줄은 알지만 나는 못 들은척 아기에게 먹일 우유준비에 얼굴도 들지 않았다.
거실 나는 오늘 몹시 피곤한 때문이다. 어제 오후엔 집안 대청소를, 저녁엔 아빠친구들이 늦게까지 놀다 돌아간 치다꺼리를 혼자 해 냈으니까.
오늘은 일을 빨리 끝내고 좀 쉬고 싶은대 그는 머리를 깎아 달란다. 하긴 이발한지가 서녀 주일쯤은 되었을테니 그럴만도 하다.
결혼후로 그는 한번도 이발소에 가 본적이 없다. 워낙 깔끔하고 알뜰한 성격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린 단 한푼도 아낄 수 있는 한은 아껴보자고 다짐했었기 때문에 아무렇게라도 좋으니 이발도 집에서 하겠다는 제의에 나는 처음 가위를 들고 정말 쥐가 뜯어놓은 시늉을 했었다.
이제 결혼생활 2년 반. 이발소 못지 않게내 실력은 그의 머리모양에서 빛난다. 그 솜씨는 회사동료들도 믿지 않을 정도다.
『당신 피곤한데 나 이발소에 가서 깎고 올까?』
맥없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얼른 대답이 나왔다.
『준비하세요. 내가 깎아 드리죠.』
그는 금방 신이 난다. 가위며 빗이며 거울을 챙겨들고 먼저 우리집의 이발소 목욕탕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피곤이 가셔지는 것을 느낀다
최숙자 (서울 영등포구 노량진동 72)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