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부터 맞춤법 익혀, 시집 낸 뜨거운 아흔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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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이 되고파/ 물이 되고파/ 바람이 되고파/ 산은 나를 보고/ 푸르게 살라 하고/ 물은 나를 보고 /깨끗이 살라 하고/ 바람은 나를 보고 웃으며 살라 하네/ 나는 산이 되어/ 물이 되어/ 바람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삼악산 자연인’ (시 ‘나는’ 전문)

 우리 나이로 아흔한 살인 오금자(90·춘천시 서면 당림리·사진)씨가 시집을 냈다. 삼악산 자락에서 자연과 함께 살고 있는 오씨는 ‘나는’을 비롯한 70편의 시를 묶어 『아흔두 살 할머니의 하얀 집』(성우에드컴 간)을 펴냈다. 제목에 ‘아흔두 살’을 붙인 것은 당초 내년 초에 출간하려던 것을 감안해 정했던 것. 시집은 시 이외에 고종황제의 근위대 대장이었던 아버지 오유영씨와 그의 가르침을 ‘부친과 나’란 항목으로 담았고, 지난 3월 1일 지방 언론사가 주관하는 마라톤대회 출전기도 수록했다.

 일제 강점기 춘천여고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까지 갔던 오씨는 한글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해방 후에도 대가족 시집살이와 6·25전쟁 등으로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농촌운동을 했던 오씨는 춘천 석사동에서 과수원을 한 데 이어 삼악산에서 사슴농장을 했다. 기르던 사슴에게 받쳐 왼손목이 부러지고, 곰에게 오른팔을 물려 1986년 농장을 정리했다. 한글을 체계적으로 배워야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던 오씨는 80세에 춘천 평생교육원 문예반에 등록했다. 그러나 나무를 베다 허리를 다쳐 2년 만에 그만뒀고, 87세에 다시 등록했으나 이번에는 눈과 귀가 어두워 진도를 따라갈 수 없어 포기했다.

 오씨는 이후 혼자 글을 썼다. 긴 글을 쓰기에는 맞춤법 등에 자신이 없어 시를 택했다. 오씨의 시는 산, 숲, 꽃, 달, 구름 등을 소재로 인생을 서정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99세 때 『약해지지 마』를 쓴 일본인 시바타 도요도 오씨가 글을 쓰는 데 자극제가 됐다. 시집은 10여 년 전 알게 된 안준희(서울시의회 공보실)씨의 권유와 주선으로 탄생했다. 오씨는 “내 나라 글로 내 생각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 좋다”며 “판매수익은 청소년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이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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