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하나의 귀감이 됨직해 화제로 삼는다. 고「해리·S·트루먼」옹은 그의 향리인「인디펜던스」시에 묻혔다. 장례식은 그야말로 조용한 가족장이었다. 물론 그는 미국사학가들에 의해 『위대한 미역대통령중의 한 사람』으로 뽑힌 일도 있었다.
그만큼 그는 국가원수로서 공헌한 바가 큰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른바 국장이나 국민장을 지내기에 부족한 임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족들은 번거로운 의례들을 고사했다. 동양적인 표현을 곁들이면 『겸양의 덕』을 보여준 셈이다. 「트루먼」옹만 돋볼 일은 아니다. 「프랑스」대통령이던 「드골」의 최후도 그랬다. 그는「트루먼」과는 또다른 차원에서 위대한 인물로 세계적인 존경을 받았었다. 그 가 운명한 것은 7O년11월11일이었다. 그러나 그 후의 모든 의식은 18년전에 이미 문서로 기록해 두었던 유언에 따랐다.
1952년1월16일에 쓰여진 그의 유서는 서두에 두가지 소망을 밝혔다. 하나는 그의 장례식을 고향인 「콜롱베 레 되제글리즈」촌에서 거행해 달라는 것, 또하나는 그 고향흙속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유서의 그 다음 구절은 시종 『…원치않는다』 는 부정사만이 거듭된다. …공개적인 행사는 원치않는다, 국민장도 원치않는다, 대통령등 정부고위관료들의 참석도 원치않는다, 「밴드」·「팡파르」소리도 원치않는다,(추도를위한)설교·연설도 원치않는다,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나의 공훈을 인정하고 승진·포상·훈장을 수여하는 일도 원치않는다….
결국「드골」은 그의 『원치 않는 소망』대로 63「달러」짜리 나무 관에 누워 고향에 묻혔다. 그의 비문도 『샤를· 드골 1890∼1970』라고만 기륵됐을뿐. 향리에서의 가족장엔 「드골」과 함께 사경을 겪은 대전의 전우들만이 참석했다.
「처칠」영국수상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장엄·화려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 장례식은 영국사상 「웰링턴」·「글래드스턴」다음인 오로지 세번째의 국장이었다. 의식이 워낙 까다롭고 엄격한 나라이긴 하지만 국장을 『남용』한 예가 없다. 그것은 정말 조국을 위해 생애를 바친 위대한 사람을 더욱 존경할 기회를 만들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실로 예의바른 대국민의 태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가까이 우리네는 많은 인사들을 사회장아니면 국민장으로 모셨다. 물론 고인의 헌신적 노고를 사회적· 국가적으로 대접하는 것은 조금도 마다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대접하는 길』이 허례허식과 같은 행사에 있다면 그것은 결코 영광스러울 것이 없다. 도리어 욕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세속이 위선과 형식에만 연연해하는 인상이 백에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정말 위대한 인물을 욕스럽게 하는 일이다. 먼나라의 예를 교훈으로 기억해두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