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놀음' 1년 … 국민은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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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겠습니다. 국민의 단합과 민주주의의 강화를 위해 승복하겠습니다. ”

 2000년 12월 13일 밤 미국 43대 대선에 출마했던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는 TV에서 이처럼 패배를 선언했다. 당시 고어는 전국적으로 33만 표를 더 얻고도 플로리다주에서 537표 차로 뒤지는 바람에 발목이 잡힌 상황이었다. 플로리다주 투표 용지는 개표의 정확성에 논란이 많았다. 플로리다 주지사가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의 친동생인 점도 석연찮았다. 민주당으로선 재검표를 요구할 명분이 충분했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이 5대4로 플로리다주의 재검표를 중단시키는 결정을 내리자 고어는 “정치적 투쟁은 끝났다”며 깨끗이 승복 연설을 했다. 당시 고어의 처신을 두고 세계적으로 미국 민주주의의 저력을 보여줬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2013년 12월 한국 현실은 정반대다. 18대 대선이 끝난 지 1년이 다 돼가지만 정치권에선 대선 연장전이 계속되고 있다. 민주당 장하나 의원의 ‘대통령 하야 요구’와 양승조 최고위원의 ‘박정희 암살’ 발언으로 여야가 연일 격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10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국론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고 도를 넘는 과격한 발언을 하는 것은 결코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쟁을 위한 것이라고 국민들께서 판단하시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양·장 의원의 발언을 겨냥한 것이다.

 오후 들어 수습되긴 했지만 새누리당의 거부로 국정원개혁특위가 한때 파행을 겪었다. 새누리당은 양·장 의원에 대한 의원직 제명안도 국회에 제출했다. 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나서 “선거를 다시 하자는 게 아니다. 대통령의 위해를 조장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며 유감을 표명하면서 사태가 더 악화되는 걸 가까스로 막았다. 하지만 이는 임시 봉합일 뿐 정치권엔 여전히 대선불복 논란을 촉발할 ‘인화성 소재’가 즐비하다.

 여권은 민주당의 친노 그룹이 정치적 재기를 위해 대선불복 심리를 선동한다고 의심한다.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친노가 야권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가장 손쉬운 방법은 지난 대선을 부정으로 규정하고 기호 2번 지지자들의 반발을 부추기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반면 민주당은 ‘대선불복’의 원조가 새누리당이라고 반박한다. 전병헌 원내대표는 “과거 새누리당에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인신 모독과 저주에 가까운 발언들이 얼마나 많았냐”며 “노 전 대통령을 인정하지 못해 재검표와 탄핵까지 추진한 것이 바로 새누리당이었다”고 말했다. 상대 당의 대선불복으로 상처받은 트라우마의 기억, 감정의 찌꺼기가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대선이 끝난 지 1년이 다 되도록 대선불복 논란이 벌어진다는 건 그만큼 정치문화가 후진적이란 의미다. 그래서 청와대와 새누리당에 대해선 ‘야당 지지층에 대한 포용’을, 민주당에 대해선 ‘대통령직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이었던 인명진 목사는 “ 직업 정치인이 대통령 보고 물러나라고 하는 건 나가도 너무 나간 얘기 ”라며 “야당이면 무조건 대통령을 깎아내려야만 입지를 넓힐 수 있다는 관성적 사고가 문제”라고 말했다.

다만 인 목사는 “청와대도 이런 발언에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서울대 강원택(정치학) 교수는 “현 정부가 지난해 대선 때 형성된 양 진영 간의 대립을 해소하는 데 미흡하기 때문에 대선불복 논란이 벌어지는 측면도 있다”며 “청와대가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48%의 유권자들을 포용하는 방식을 더욱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또 “대다수 국민은 박 대통령이 국정원 댓글 때문에 당선됐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식으로 미루다 보니 불필요한 논란이 확산됐다”며 “박 대통령이 국정원 선거개입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유감을 표시하고 관련자 책임 처벌 의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정하·하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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