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주체성 없는 기자 회견|한승헌 <변호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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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서울에서 열린 제2차 남북 적십자 본 회담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남겼다. 북쪽 대표들이 공산주의자들이기 때문에 회담을 둘러싸고 유형무형의 정치 선전 공세를 펼 것으로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고 귀로들은 그들의 정치 선전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13일에 있었던 조선 「호텔」 본 회담장에서의 북적 자문위원 윤기복과 김병식의 축하 연설은 오히려 순조로운 본 회담 진행을 고의로 방해하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운운』『민족의 주체성…』하는 말은 그들 자신들에게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와 만성이 됐겠지만 우리들 자유 시민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지난 12일 북적 대표단 일행이 서울로 올 때 연도에선 시민들의 진심으로 회담 성공을 기원하며 따뜻한 환영의 모습과 13일 본 회담의 끝난 후부터의 무표정한 냉정한 태도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설마…』 『그래도 적십자 정신을 모독할 수 있을까』하는 일말의 기대가 무너지자 공산주의자들의 본성을 새삼스럽게 체득한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북적 대표단 일행은 우리 자유 세계의 장점과 좋은 것을 보고 난 후의 소감은 으례 헐뜯기 위한 비판이었다. 이들이 항상 내세우는 것은 『민족의 주체성…운운』이었다. 이후락 남북 조절위 공동 위원장의 말과 같이 어느 누가 주체성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를 뇌까리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주체성을 의심하게 되는 것을 금할 수 없다. 민족 주체성이 뚜렷한 그들이 「레닌」 모자와 모택동 복장을, 그것도 성역인 현충사에서 「선글라스」까지 끼었던 것인가.
북적 자문위원 김병식은 우리 측 기자를 제쳐놓고 외신 기자들과의 기자 회견을 자청, 일어를 사용한 것을 주체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물론 공산 사회에 처해 있는 그들의 고충도 이해는 간다. 현재의 직위를 고수하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는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을 잠꼬대에서까지 되풀이해야 하는 불쌍한 처지임을 모르지 않으나 최소 한도의 예의나 국제적인 체면을 잃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4박5일의 짧은 견문이지만 몸으로 부딪쳐 본 자유 세계의 본질이 앞으로의 회담 진행에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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