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아이디어 안 떠올라 스트레스 받는다는 30대 후반 마케팅 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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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30대 후반 직장인입니다. 회사에서 마케팅 기획 업무를 담당하는 팀장이다 보니 창조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강박이 존재합니다. 책이나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얻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도 갖지만 팀원일 때보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 답답합니다. 회의 때 티는 안내지만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팀원들이 부러우면서도 불안합니다. 일단 체면이 안 서고요. 좋은 아이디어를 내게 만드는 심리적 방법이 있을까요.

A 심리학을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사람은 나름 자기 마음을 다루는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학교 교육이나 다양한 매체를 통해 부지불식 간에 마음 다스리는 테크닉을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배운 테크닉을 자신의 특성에 맞게 변형해 마음을 다루는 것이죠.

 많은 사람이 쓰는 마음 다루기 기술 중 하나가 조정 전략(control strategy)입니다. 인간의 잠재력은 무한하기에 그걸 잘 캐내 활용하자는 것이죠. 시간 관리 전략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시간이 곧 돈이니 빡빡하게 시간을 짜서 뇌가 업무를 최대한 수행할 수 있게 돌리자는 겁니다. 대학 시절 들었던 한 종교단체의 시간 관리 강의에서도 시간 관리를 절대 선(善)으로 간주하더군요. 이 강의에 따르면 뇌를 그냥 놀게 두는 건 죄악인 셈입니다.

 개인이 이렇게 시간 관리를 하지 않아도 우리가 속한 사회 시스템은 우리 마음을 충분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적당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최고의 업무 효율을 올릴 수 있다는 적정 스트레스 이론(optimal stress theory)이 조직 관리 시스템에 깊이 내장돼 있으니까요. 회사 내의 경쟁 시스템과 성과 관리 시스템 등이 그 예입니다.

 그런데 업무를 하다 보면 내 뇌를 쥐어 짜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한계를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상황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하고요. 왜 그런 걸까요.

 신경과학(Neuroscience) 연구의 발전으로 그동안 신비에 쌓여있던 우리 뇌에 대한 지식이 쌓이고 있습니다. 기능성 뇌 자기공명영상 촬영장치를 이용하면 뇌를 외부로 노출시킨 후 특정 부분에 전극을 대지 않고도 뇌의 특정 부분의 활성도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뇌 기능 연구가 수월해진 거죠.

 초기엔 인간의 특정 기능을 행하는 뇌의 영역이 어디인지 확인하려는 노력이 많았습니다. 뇌의 특정 영역이 특정 기능을 행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중요한 기능은 뇌의 여러 영역이 네트워크를 이룬 결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네트워크 사회라고 하는데, 뇌도 비슷한 셈입니다.

 개인적 성취나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는 혁신적 아이디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가 기울어가던 회사를 기사회생시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의 아이디어로 애플은 최고의 기업이 되었고요.

 열심히 고민하며 아이디어를 짜내면 창조적 생각이 잘 떠오를까요. 다들 엉뚱한 장소에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뇌는 특정 목적, 즉 업무(task)를 수행하지 않을 때도 작동하고 있는데요. 이를 담당하는 신경 네트워크를 영어로 태스크 네거티브 네트워크(task negative network), 즉 목적 수행과 상관 없는 네트워크라 합니다. 혹은 기본적인 시스템이라는 뜻에서 디폴트(default) 네트워크라고도 합니다.

 업무 수행이 외부의 새로운 정보나 자극을 처리하는 것이라면, 디폴트 네트워크는 이미 내재된 정보와 지식을 처리하는 과정입니다. 혁신적 아이디어는 이 디폴트 네트워크가 잘 작동할 때 쑥 튀어 나옵니다. 디폴트 네트워크는 업무 수행을 하지 않을 때 작동하기 때문에 죽어라 일만 하는 것보다 뇌를 좀 놀게 해줘야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얘기입니다.

 물끄러미 창 밖 경치를 보다 기차에서 내렸을 때, 자주 오던 곳인데도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을 혹시 해보셨는지요. 디폴트 네트워크가 활성화하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초월성 경험(transcendence)이라고 하는데, 옛말로 도(道)를 닦는 것과 비슷한 효과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의학이 아닌 비즈니스 영역에서도 신경과학적 현상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디폴트 네트워크가 잘 활성화할 때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잘 튀어 나오기 때문이죠. 검색 사이트를 운영하는 미국의 한 유명 IT 회사는 ‘20% 타임’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고 합니다. 기존의 업무와 상관 없는 자유시간을 뇌에 주는 겁니다. 또 한 유명 마케팅 회사는 직원들이 1년에 100~200시간은 흥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한다고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너의 날(your day)’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컨설팅 회사도 있고요.

 결과는 어땠을까요.

 프로그램을 경험한 직원 대부분에서 만족감과 행복감, 그리고 동기 부여 정도가 향상되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디폴트 네트워크가 업무에서 벗어날 때 작동하는 거라면 이런 프로그램을 또 하나의 업무로 인식하는 순간 디폴트 네트워크가 충분히 활성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요. 디폴트 네트워크를 활성화하라는 새 업무가 뇌에 주어진 셈이니까요.

 그러니 우리 회사에 그런 프로그램이 없다고 낙담할 건 없습니다. 스스로에게 ‘나의 날’을 만들어 주면 되니까요. 연구 결과 양보다 질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긴 시간을 업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있느냐보다 짧더라도 깊이 있게 초월성 경험을 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말입니다.

 몇 가지 팁을 드린다면 한 달에 한 번 잠깐이라도 e메일이나 일정 관리(플래너)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사무실에 두고 훌쩍 짧은 기차여행을 떠나는 건 어떤가요. 서울역에서 무작정 떠나는 거죠. 그리고 어딘가에서 잠시 내려 산책한 후 돌아오는 겁니다. 오가는 기차 안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창문 밖 경치를 감상하고요. 이 내용 없는 듯한 간단한 여행이 복잡한 계획을 가진 긴 여행보다 디폴트 네트워트를 활성화해 우리 뇌의 잠재력을 더 키워줄 수 있습니다.

 명상 활동도 도움이 됩니다. 명상은 바쁜 내 일상과 거리를 두는 마음 훈련이니까요. 명상을 따로 배우지 않더라고 기차 밖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명상 효과는 일어납니다. 점심시간 잠시 스마트폰을 책상에 놓고 혼자 조용히 걷는 것, 이 역시 뇌 안의 숨은 파워인 디폴트 네트워크를 활성화합니다.

 스트레스가 과도한 피로 사회에선 뇌를 이렇게 그 시스템에서 잠시 떼어 놓을 때 힐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을 안 하고 쉬는 그 힐링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 생존과 경쟁의 근간이 되는 창조적 아이디어가 찾아옵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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