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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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규장각 장서 중에서 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정다산의 「흠형전서」등 10종과 「경세유표」 등 친필 원본 14종이 발견되었다. 근래에 이르러 규장각 장서 중에서 자주 진귀본들이 발견되곤 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규장각이야말로 정녕 한국학의 보고임을 새삼 실감케 할 정도이다. 지금도 비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연지에는 부용 정이 있고, 그 맞은편에 주합루가 높다랗게 동남향으로 서있다. 이 주합루의 편액은 숙종의 친필이라는데 여기가 정조 때부터 자리잡고 있던 규장각의 옛터이다.
규장각은 숙종 때부터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저 역대 왕의 어필·어제를 보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규장각이 세종 때의 집현전과 같은 학문의 중심이 된 것은 정조 때부터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왕조 후기의 「르네상스」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규장각은 갑오경장과 함께 폐지되었다. 경비를 아끼자는 뜻에서였다. 그 후 한·일 합병과 합께 규장각 장서는 조선 총독부에 넘어가고 서울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왔다.
이 속에서 다산의 <경세유표> 친필 원본이 나온 것이다. 그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백관이 불 비하고 정사가 무 녹하며 빈 풍이 심하여 우민이 병들었으니 이런 제도, 이런 정치를 지금 개혁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라는 망하고야말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충신지사가 수수방관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말한 정다산도 자주 규장각을 드나들었는가 보다. 아니면 규장각에 모인 학자들이 다산의 책들을 애독했음이 분명하다. 그토록 많은 다산의 책들이 규장각 장서 속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이조 후기에 있어서는 어느 모로나 다산을 따를 학자는 없었다. 그는 수원성을 설계하고 기중기를 고안할 정도로, 철학뿐이 아니라 과학에 이르기까지의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위대함은 21세 때의 시 『술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치 주머니 속에 갇혀있는 듯…언제나 사지를 펴지 못하고 큰 기상 넓은 뜻을 채울 길이 없어라. …뭇 바보들은 한 놈을 떠받들고 다 같이 숭상하라 고함지른다.』
이런 소리를 한 그가 순탄한 길을 걸을 턱이 없었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죽자 그는 18년의 오랜 유배생활을 겪어야만 했었다.
『통치자가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백성이 통치자를 위해 있는 것인가』하는 그의 경고를 아무도 귀담아 듣지도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만한 인물이 나타날 수 있던 시대는 차라리 다행스러웠던 게 아닌가하는 감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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