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독해」취지에 어긋난 선정|「중·고교 기초한자」제정을 보고|임창순<태동 고전연구소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문교부는 과거의 「상용한자」를 제정한 바 있다가 「한글전용」교육을 추진하면서 그 존재의의가 희박해졌고 다시 한동안은 「약자」를 제정한 바 있었으나 이것도 같은 이유에서 그대로 휴지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뒤 학계·교육계는 물론 언론계에서까지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자 당국은 마침내 교육에서 한자폐지의 기정방침을 굽히고 다시 한문교육을 부활시키는 동시에 제한한자 선정에 착수, 처음에는 「한문교육을 위한 기초한자」를 제정했다가 다시 일부를 수정하여「중·고교 한문교과용 기초한자」 1천8백자를 발표했었다.
그러면 그 취지가 국어에서 상용되는 것이 아니요, 한문교육을 위한 기초적인 것을 뽑는데 그 목표를 두어야 할 터인데 이제 제정된 내용을 보면 이것은 한문교육을 위하기보다는 국어에서 사용하는 상용한자에 더 치중한 듯 하다. 가령「적·건·비·항·권·쇄·답·착·안·판」등 국어로서는 많이 쓰이나 고전을 독습하는 데는 그 빈도가 극히 드문 한자들이 많이 들어있으며 고문에서 많이 쓰이는 중요자들이 제외되었다.
가령 「가」항에서만 하더라도 「간·가·갈·개」 등은 잦은 빈도를 갖는다. 이렇게 된다면 고전으로서 가장 많이 읽히는 논어의 첫 장인「인불지이불온, 불역군자호」도 온 자의 제한 때문에 교재로 다루지 못하게 된다. 이 제정안이 처음 나왔을 때「야·의·호·재」등 어기사 자를 제외했던 것만 봐도 국어상용자에 치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국이 「한글전용」방침을 변경하지 않는 이상 국어에 한자가 혼용되지 않을 것이므로 국어를 위한 상용한자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다.
필자는 「한글전용」을 전적으로 찬동한다. 지금 한자의 모국인 중국에서도 한자는 폐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더구나 훌륭한 한글을 가진 우리가 어려운 한자를 사용하려고 고집하는 것은 부당하다.
일본이나 중국은 언과 문의 사정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한자를 안 쓸 수 없으므로 부득이 이를 제한하는 동시에 음만 같으면 다소 형태가 다르더라도 의사가 통할 수 있는 것은 이를 통일하는 방침을 취하였고, 또한 약체자를 제정하여 사용에 편리하게 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생활한자로 l천5백56자를 채택하였고 일본에서는 l천8백50자를 「당용한자」로 제정하고 국민학교에서 8백50자의 「교육한자」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어려움 없이 한글로 충분히 쓰고 읽을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것은 비록 상용한자를 쓰지 않는다 할지라도 국어의 대부분이 한자어로 되어있는 만큼 어의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한자교육은 국민학교부터 실시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한자를 쓰자는 것이 아니요, 어원을 밝히기 위한 기본적인 것 5∼6백자 정도는 알게 하는 것이 과도기로서 불가피한 일이다. 이것은 중·고교에서 한문교육을 위한 준비교육으로서도 필요하며 또 이 정도는 학생들에게 그다지 큰 부담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안에서는 중등부와 고등부를 나누어 놓았다. 쉬운 데서부터 어려운 데로 들어가는 차서를 밟는다는 것은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이 한자교육이 아니요, 한문교육인 이상 중·고를 이렇게 엄격히 나누는 데는 모순이 생긴다.
한문에 있어 쉽고 어려움은 문자에서보다 문장의 내용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쉬운 글자를 늘어놓았더라도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고급문장이요, 글자가 어렵더라도 해석하기가 용이한 것은 평이한 문장이다.
그러므로 교재를 선정하는 데는 문장에 중점을 두는 것이 더 중요하며 문장을 가르치는 데에 9백자로 제한한다면 이는 고전 중에서 독본을 뽑기에는 너무나 많은 제약을 받아서 결국은 문장보다는 국어에 소용되는 정도의 교재가 되고 말 것이니 이미 문교당국에서 밝힌 고전독해를 위한 교육과는 거리가 멀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고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한글전용을 강력히 추진하고있는 이때에 한문교육은 그 취지가 교육을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전과 접근할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대학에서 이 방면의 학문을 닦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초를 마련해주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렇다면 반드시 그렇게 글자를 제한하지 말고 다만 자유롭게 교재를 선택하되 문자에서나 내용에서나 너무 어려운 것만 피하도록 방침을 정하고 거기에 따른 어떤 원칙만 세우면 될 것이다.
한자의 기초는 다음의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내용, 즉 의의소로서 볼 때 제자상 기본이 되는 부수 (예‥「삼수 변은 물에 속하고, 「목」은 나무, 「재방 변」은 손, 「책받침」은 걷는 것 등)가 그 기본이 되며 ②형식, 곧 음성 면으로 볼 때 운모자(예‥자는「자」자, 자·자·자 등, 이는 「이」 이·이·이·이 등, 비는 「비」 비·비·비·비 등)가 기본이 되며 ③문장의 기능어로서 필요한 부사(개·범·편·근·우·사 등), 어기사(야·의·언·야 등), 연사(지·급·이·즉 등), 개사 (이·여·어·우 등), 의성사 (차·희·후·우) 등이 구문상 기본이 된다.
이상에서 ①과 ②는 문자의 기초며 ③은 구문상 기초다. 이 두 가지의 기본이야말로 한문의 기초자가 될 것인데 이 안은 이런 면은 거의 고려에 넣지 않은 것이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한자의 구성은 대개가 위에 말한 기본자, 곧 의의소와 형식면에서의 계보를 세우면 자의와 음을 아는 데는 그다지 많은 노력이 들지 않는다. 한문을 공부함에 있어 글자가 어렵다는 것은 제 2의에 속하는 것이므로 결론적으로「한문교육을 위한 한자제한」이란 결국 무의미한 것이 된다.
이 안이 나온 뒤에 일반에서 환영의 뜻을 표하는 것은 한문교육면에서라기 보다 국어에 상용되는 한자를 가르친다는 데에서 지지도가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