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하의 정치파동|관의 이범석 견제 노골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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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장택상씨와 이범석장군의 대립은 당초에는 사소한 감정에서 시발했으나 정치파동을 수습하면서부터는 양자가 파동수습의 논공을 내세워 누가 이승만대통령의 총애를 더 받고 권력을 장악하느냐는 문제로 번져나갔다.
이범석장군이 처음부터 강력한 족청세력을 배경으로 하고있었는데 비해 장택상총리는 당초에는 정당의 배경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발췌개헌안을 내놓으면서부터 원내인사를 포섭해 신라회란 원내교섭단체의 「리더」가 되고 또 일부원외자유당인사의 동조를 얻게되자 어느새 자신이 강력한 반족청세력의 「리더」로 치솟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중석불사건으로 족청 낙조
더우기 이승만대통령이 이범석장군을 달갑게 여기지 않음을 눈치채자 책략의 귀재인 장총리는 이번에야 말로 이범석씨와 그의 세력을 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한편 반이범석세력은 원외자유당 안에서도 싹트고 있었다.
정치피동을 수습하면서 족청세력이 원외자유당의 주도권을 잡자 이기구의 비족청세력은 이대통령에게 족청계가 파벌을 조성한다고 모함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정계를 휩쓴 중석불사건은 족청세력의 낙조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에서 시행된 규정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정부보유불 또는 중석불(은행보유불)로는 양곡 또는 비료수입을 못하게 돼있었는데 정부는 긴급을 요한다는 이유로 대한중석 고려흥업 미진상사 남강무역 등 13개 회사에 중석불 약 4백만「달러」를 불하해 비료와 양곡을 수입케 했다.
공정환율은 6천대1이었지만 암시세는 두 배가 넘는 당시 상황에서 이들 상사들은 수입해 온 비료와 양곡을 자유 처분함으로써 무려 5백억원이나 되는 폭리를 취했다.
이것이 중석불사건의 내용이었는데 이 사건이 더욱 큰 문제로 국회에까지 비화된 것은 엄청난 폭리의 상당액이 족청이 지배하고 있는 원외자유당간부에게 들어갔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검찰이 관련상사를 입건조사하고 국회 특조위까지 구성해 조사를 했으나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이 사건은 국무원불신임안 제출까지 가져왔다.
이 불신임안은 표결결과 가93 불45 기권3 무효2로 재적의원 3분의2 ?성미달로 폐기됐으나 그만큼 정계를 휩쓴 사건이었다.
이승만대통령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금전횡령이나 낭비를 가장 싫어했다. 중석불사건이 말썽이 되자 이 박사는 원외자유당인물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따라서 원외자유당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족청계가 어쩔 수 없게 이박사의 눈밖에 나게되었다. 이 같은 상황속에서 이범석장군은 원외자유당의 공천으로 부통령 후보로 나선 것이다.
당시 대통령후보로는 이승만 초대대통령, 이시형 전부통령, 보봉암 국회부의장, 신오우 전주일대사가 나섰고 부통령후보에는 이범석장군, 심계원장 함태영, 국회의원 이갑성, ?진한, 군정때 경무부장인 조병왕, 광진사장인 백성욱, 초대상공장관인 임승창, 전총리서리 이윤영, 국회의원 정기원씨 등 9명이 난립했다.
대통령출마가 예상되던 장면박사는 『5·26국회수난이래 많은 나의 지지자들이 희생됐다. 내가 여기 출마하면 다시 더 많은 희생자가 날 우려가 있어 대통령출마를 사양한다』는 성명을 내고 출마를 포기했다.
부통령후보들은 민국당의 종병왕 후보를 제외한 모든 후보가 이승만박사를 대통령후보로 업고 나온 기이한 난맥상을 보였는데 일반은 세력기반이나 인물로 보아 이박사와 같이 원외자유당의 공천을 받은 이범석장군이 당연히 부통령으로 당선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이승만대통령후보는 족청제력에 대한 반감으로 정치세력이 없는 순수한 인물인 함태영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고있었고 이 같은 이박사의 뜻을 직감한 장택상총리는 관권을 동원해 이범석후보의 당선방해공작을 벌였다.
이에 관한 관계자의 얘기.
▲김태선씨(당시 내무부장관·전 서울시장·68)<이범석장군이 부통령후보로 나서기 위해 내무장관을 그만두자 장택상총리가 나를 내무장관으로 추천해 7월2일 취임했는데 선거를 불과 2주 앞둔 때였읍니다.
족청계에서는 홍모 당시 내무차관을 장관으로 시키려고 애썼으나 장택상총리가 나를 밀었다더군요.
진해에 갔다온 이박사에게 복명차 가 부통령후보에 대해 얘기하니 『이범석내무장관이 임명한 치안국장 각도경찰국장 등을 그대로 두고 그가 공천을 받았는데 어떡하겠나. 선거에 있어 행동을 조심하게. 국민이 다 알아서 할텐데 내무장관이 어떻게 한다고 되겠나. 앞으로 공정하게만 하게. 안 그러면 족청에게 두들겨 맞네』라고 하십디다. 이범석후보를 바랐다면 힘껏 지원해보라고 하실텐데 이 말을 듣고 보니 의중에 딴 후보를 생각하고 있구나고 .추측을 했어요.
이후보의 대형「아치」에 철거령
그런데 하루는 장택상총리실에 가서 대통령에게 인사하고 온 얘기를 했더니 『그분은 함태영씨를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라고 해요. 어떻게 그걸 알았느냐고 했더니『그 분은 단수가 높아 그런 언질은 안 주었지만 아는 수가 있지. 내가 대통령을 만나 함태영씨 말을 했더니 회색이 만면하더라』고 합디다.
이박사는 족청에 대한 반감으로 정치적 배경이 없고 순수한 함태영씨를 의중에 두고 있었지만 이박사가 함태영씨를 생각하게 된 데는 함씨에게 긴 신세를 갚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이박사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됐을 때 판사이던 함태영씨의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어요.
은혜는 꼭 갚는 성격의 이박사는 나이도 많은 그 분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에서도 부통령으로 당선됐으면 생각했어요. 정·부통령선거가 한창 진행될 무렵에 이박사의 비위를 더욱 건드린 것은 원외자유당에서 만든 대형「아치」였다. 이박사는 진해에 갔다 부산에 오는 길에 역전에 마련된 이범석후보의 초대형 사진이 걸린 선전「아치」를 목격했다.
원외자유당에서 만든 이 선전「아치」에는 이승만후보와 이범석후보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었는데 묘하게도 이박사의 눈에 띈 것은 이범석후보의 사진뿐이었다.
불쾌하게 생각한 이박사는 선거자금은 적게 써야한다는 이유로 대형사진을 철거할 것을 지시했다.
이 같은 지시가 내리자 각도에서는 이박사가 이범석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것을 알고 경쟁이라도 하듯이 이박사 사진과 나란히 붙은 이범석후보의 사진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장택상총리는 각도에 이범석후보 방해지령을 했다. 당시 도지사를 지낸 한 관계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천실일실 이후보측의 고발전
▲전당식씨(제혜의원·당시충남지사·전내무장관·70)<부산에서 장택상총리주재로 지방장관회의가 열렸는데 일반지시사항이 시달된 후 총리가 각 지사를 개별로 불러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빼놓습디다.
다음날 돌아갈 때 쯤 돼서 최규옥강원지사에게 총리가 개별적으로 불러 무슨 지시를 하더냐고 물었더니 이범석후보를 원외자유당에서 공천했으나 이박사와 정부는 함태영씨를 밀기로 했으니 협조하라고 하더라고 해요.
선거를 며칠앞두고 장택상총리가 선거독려한다고 충남에 왔을 때 그는 송주경찰국장을 따로 불러내 나도 모르게 무슨 지시를 하데요.
나는 송국장에게 『총리가 함태영씨를 밀라고 지시한 모양인데 그러나 나는 이범석후보를 밀겠다. 당신은 당신소신대로 처신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박사가 이범석장군을 싫어하게 된 것은 원외자유당 중 비족청세력이 이장군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시기해 모략한 것이 많이 작용했어요.>
장택상총리가 이범석후보를 방해하는 지시를 하고 광주에서 자유당이 너무 일방적으로 날뛴다는 발언을 하자 가뜩이나 이박사의 지지를 얻지 못해 안타까운 원외자유당은 선거를 1주쯤 앞두고 장택상총리와 김태선내무장관, 윤자경치안국장을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선거·3일 앞두고 형노염변
그러나 이 고발사건은 이범석후보에 더욱 불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고발내용의 신문보도를 보고 유권자들은 이게 이범석후보가 이박사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되었고 이렇게 해서 선거를 불과 3일 앞두고 부통령의 대세는 함태영씨에게 기울어졌다.
다시 관계의 증언
▲김태선씨<원외자유당간부인 이호·?견환씨 등 6,7명이 선거 1주일쯤 전에 나에게 와서 국무총리와 내무장관 치안국장이 강권을 발동해 선거간섭을 하고 자유분위기를 호리게 했다고 고발하겠다고 합디다. 나는 그 같은 짓은 이박사지지를 못 받았다는 것을 선전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범석후보를 당선시키려면 가만있으라고 했더니 그날 한격만 검찰총장이 고발당했다고 말합디다.
그런데 고발내용이 보도되자 족청반대단체는 신문을 사다가 뿌렸고 함태영후보는 가만히 앉아 신문으로 선거운동을 했어요. 가만히 두었으면 족청세력이나 명성으로 보아 이범석후보가 당선됐을지도 몰랐어요.>
투표결과는 일반예상대로 대통령에 이승만후보가 총유권자 약8백20만명 중 5백23만여 표로 압도적으로 당선됐고 부통령에는 함태영후보가 2백94만여 표로 차점자인 이범석후보의 1백81만표보다 무려 1백만표 이상 차이로 당선돼 선거과정에 있어서 장택상총리와 이범석장군의 대결은 전자의 승리로 끝맺었다.
그러나 곧장 총리도 족청계의 호된 반격을 받고 실각하게 된다.
◆주요일?(1952년3월20,21,22,23일)
※20일▲지상전투, 소강상태▲원외자유당<전국대회개최, 총재에 이승만박사, 부당수에 이범석씨 추대
※21일▲B-29, 북한주요지역 야간공습▲이대통령, 경인지구시찰▲호지명군, 불군과 격전
※22일▲한국공군, 공산철도 폭격▲ 「맥아더」원수, 「트루먼」행정부 공격
※23일▲「리지웨이」장군, 공산측의 세균전 비난을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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