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레바논의 신종 시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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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 저항단체들이 설치한 교통표지판.

레바논의 베이루트 시내 거리에 교통표지판이 갑자기 증가했다. 지난 며칠 동안 자고 일어나면 새롭게 등장하는 교통표지판에 시민들은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레바논 내 저항 단체들이 밤마다 설치하고 있는 가짜 교통표지판들이다. 반미.반유엔 일색이다. 빨간색 바탕에 흰 글씨로 쓰여있는 '정지' 표지판 밑에는 '1559'라는 숫자를 담은 직사각형 판이 부착돼 있다. 레바논 내 모든 외국군대와 민병대의 철수.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유엔결의안 1559를 거부한다는 의미다.

결의안은 지난해 9월 통과됐다. 새로운 종류의 표지판도 등장했다. 빨간색 원에는 '절대 안 된다'를 의미하는 아랍어 부정어 '라'가 새겨져 있다. '라'밑에는 '외세의 간섭'이란 아랍어가 적혀 있다.

교통당국은 2일 "친시리아계 최대 무장단체인 헤즈볼라 단원들이 교통표지판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저항-진정한 길'이라는 표지판이 자주 눈에 띈다. 레바논 남부에서 20여년째 이스라엘에 대해 무장 저항을 하고 있는 헤즈볼라가 자주 쓰는 표현이다.

이들 표지판이 길게 늘어진 공항도로를 지나는 시민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일부 시민들은 박장대소와 함께 박수를 보낸다.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있다. 몇몇 사람은 "운전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이 표지판들을 떼려는 사람들은 없다.

경찰당국도 이를 평화적 시위로 인정하고 있다. 내용에 대해서도 그리 문제시하지 않고 있다. 친시리아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외세 개입 근절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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