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1)내가 아는 이 박사<제26화>경무대 사계 여록(148)|모윤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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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그의 인품>
내가 이 박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45년 11월 돈화문 건너편, 한때 국립국악원이었던 건물에서 열린 민족 대표자대회에서였다. 그 때 이 박사는 회색 두루마기를 입고 회의에 나왔었다. 당시 사회풍조는 일본 총독부 치하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던 사람들보다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돌아와 거리낌이 없던 망명 애국자들에게 기대가 쏠리고 있었다.
이 대회에서 가장 지도자로 추앙을 받던 이 박사와 백범(김구)선생은 서로 상대방을 지도자로 추대해야 한다는 사양만 하고 있었다. 답답한 생각이 든 나는 발언권을 얻어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여성입니다만 지금은 사양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빨리 혼란한 정세를 무마하기 위해 국내에 계시든 분들에게도 똑같이 기회를 주어 합심합력 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고 당돌하게 얘기했다.
여자로서는 나 혼자만이 발언했는데 그것이 인상적이었던지 그날 오후 이 박사 비서였던 만송으로부터 이 박사가 보자고 하니 돈암장으로 오라는 전화가 왔다.
돈암장에서 이 박사는 내 신상과 문학에 대해서 묻더니 『지금은 여성이 앞장서서 일해야할 때야. 나라를 위해 나를 좀 도와줘』하고 부탁했다.
이후부터 돈암장·이화장엘 드나들게 됐다. 이때 이 박사를 돕던 여성으로는 나 외에도 임영신 박순천 김활란 선생이 있었는데 그중 내가 제일 어렸다. 그래서인지 이 박사는 이미 35살이 넘은 나를 소녀같이 취급했고 부를 때도 『「미스」모』 라고 했다.
이 박사는 정치적 야망이 대단했지만 남다른 여유도 갖춘 분이다. 많이 알려진 얘기지만 틈틈이 시도 쓰고 서도도 즐기는가하면 골동품 취미도 대단한 분이었다.
인삼차를 즐기는데 보통 찻잔에 마시지를 않고 꼭 오지잔으로 마셨던 기억이 난다. 여유가 만만하고 폭넓은 자존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노여워하는 일없이 소화를 해주었다.
나는 비교적 응석 비슷하게 이 박사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하고싶은 얘기를 다 했는데 그 때문에 이 대통령은 노여워한 일은 없었다.
6·25 사변 얼마 후로 기억된다. 이 대통령을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끝에 대통령은 『내가 얘기를 하면 아니라는 사람 못 보았어. 모두 「예, 예」만하니 큰 일이야, 장관이란 사람들도 보고만 하고 건의라는 게 없어』하고 개탄하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이 박사는 자기에게 저항하지 않는 이상 민주적인 토론을 좋아하는 분인데 세월이 가면서 그런 대있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멀어진 것 같다. 언제인지 이 박사로부터『하고 싶은 말하는 사람 다섯만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이 박사의 보통사람 같은 신경질적인 자존심이 아니라 폭넓은 자존심은 외국인을 대하는데서 특히 잘 나타났다.
일제하에서도 그랬지만 해방 후에도 우리 나라 사람들은 외국인에게 열등감을 갖고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박사는 당초 그렇지는 않았다.
미 군정에서 「하지」 군사령관에게 조금도 굽히지 않고 대결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미 국무성의 고위관리가 이 대통령을 만나고 나온 직후 나를 경무대로 불렀다.
올라가 보니 이 박사는 무척 화를 내고 있었다.
『「미스」모, 글쎄 그 자가 나에게 한·일 회담을 하라지 뭐야. 왜놈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했는데 한·일 회담을 한다는 얘기야. 우리가 우선 해야할 급한 일이 열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끝나면 열 한번 째로나 한·일 회담을 고려할 수 있을까 말까한데.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이….』『모르긴 왜 모르겠어요. 모르는 얘기로 하면 왜 할아버지는 「얄타」회담을 모르셨읍니까』
『내가「하와이」에 있으면서 간접적으로 듣긴 했으나 확실히는 몰랐지, 우리가 바보고 약해서 그런 거야, 이런 것을 알아내 막는 것이 제2 독립운동이지, 통일이 되어야 완전히 독립을 이룬 것이야』. 내가 보기로는 그래도 이 박사 비슷한 사람은 유석 정도고 대개는 외국인 특히 미국사람들에게 물렁물렁해 보였다.
이 박사 하면 주체성이 강한 한국사람이라는 인상이 아직도 내게는 강하다.
이 박사는 무척 소탈하며 「유머」도 있는 분이었다. 이화장에는 벚나무가 있었다. 그때는 이 박사가 나를 무척 요긴하게 심부름을 시킬 때였다. 하루는 창랑의 부인과 이화장으로 문안을 가니 이 박사는 작은 바가지를 들고 정원으로 나와 『「마미」 나오는가 망 좀 봐』하면서 손수 버찌룰 따러 나무위로 기어올라갔다. 우리는 망을 보면서 서로 쳐다보며 『머슴영감같이 소탈한 데도 있다』고 키득키득 웃던 것이 기억난다.
노인이지만 단정한 모습, 폭넓은 자존심, 「유머」, 여유로 표현되는 이러한 정신적 품격이 어울려 이 박사는 여성들에게 호걸을 쳐다보는 듯한 호감을 가져 왔던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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