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주민 모두 선생님 … 어른 보면 "곤니치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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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 야루 위크에 참가한 일본 다루미중 학생들이 고베한국교육원 강당에 모여 장구를 배우고 있다. [사진 고베한국교육원]

지난달 16일 일본 효고(兵庫)현 고베(神戶)시 다루미(垂水) 중학교에선 학교를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오픈스쿨’ 행사가 있었다. 공개 대상은 주로 학부모들이지만 누구라도 수업 내용을 지켜볼 수 있다. 취재진은 사전예고 없이 수업 중인 중학교 2학년 교실에 들어가 봤다. 교사와 서른 명 학생들의 시선이 낯선 방문객에게 일제히 쏠렸다. 조용히 눈인사를 건네거나 목례를 하고 수업을 진행할 법도 했다. 하지만 50대 여교사는 수업을 완전히 멈추고 고개를 숙여 ‘곤니치와’라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곧바로 학생들도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돌려 한목소리로 인사했다.

지역사회가 함께 키우는 아이들

 이곳 학생들에게 인사는 몸 깊숙이 밴 습관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동하며 웃고 떠드는 자유 속에도 학부모들이나 어른을 만나면 그냥 스쳐 지나는 법이 없었다. 가던 길을 멈춰서서 눈을 마주치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이 학교 에비스 도요카즈(成豊一) 교감은 “아이들에게 공부도 중요하지만 어른을 공경하고 예의를 갖추는 게 더 중요하다”며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른을 만나면 꼭 인사를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무조건 어른에게 인사를 하라고 다그쳐서 될 일은 아닐 터. 비결은 학교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베는 일본에서도 아이들을 키우는 데 지역사회의 역할을 강조하는 곳이다. 실제로 시내 곳곳에 ‘지역사회가 아이를 키운다’는 표어가 붙어 있을 정도다. 온 마을이 학교인 셈이다.

계기가 있었다. 고베는 1995년 규모 7.2 대지진이 발생해 6300여 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겪었다. 1997년엔 고베에 사는 14세 중학생이 초등학생을 잔혹하게 살해해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뜨렸다. 지진 사고 후 복구 과정을 겪고,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인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후 고베의 학교들은 유독 학교 밖에서의 활동이 많아졌다. 지역 축제나 행사가 있으면 봉사활동을 하고,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전철 역사 주변을 청소하러 나간다.

“응원 고맙다” 야구부가 거리 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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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2세로 고베시 미나토가와(湊川) 공립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방정웅(60)씨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전철역 주변에서 인근 고교 야구부원들이 쓰레기를 줍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고 말했다. 고시엔(甲子園·일본고교야구선수권) 때 지역 주민들이 보내준 응원에 감사하는 의미로 봉사활동을 펼치는 것이다.

 우리의 시교육청에 해당하는 효고현 고베시청 산하 교육위원회도 인성교육을 위해 지역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홍보·유도하고 있다. 마을 축제나 행사에 학생들을 참여시키라는 것이다. 새해가 시작되면 각 학교 대표(교장 또는 교감)가 모여 연간 활동 계획을 세운다. 다루미중 아리모토 나오미치(有本直道) 교장은 “우리 학교로 진학하는 초등학교 등 인근 학교 서너 곳이 모여 마을 행사에 어떤 학교가 어떻게 참여할지 연초에 계획을 잡은 후 수시로 만나서 다시 조정을 한다” 고 말했다.

 중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트라이 야루 위크(Try Yaru Week)’ 프로그램도 대표적인 지역참여형 인성교육이다. 1998년부터 효고현에서 실시해 오고 있다.

동네 식당·미용실서 직업 체험도

2학년 학생들은 매년 11월이면 5일간 학교 대신 본인 희망에 따라 식당에서 서빙을 하기도 하고,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돌보기도 한다. 제조업체와 복지시설, 제과점, 미용실 등 소규모 점포에까지 학생들이 다녀간다. 일종의 진로 탐색 프로그램이지만 사실은 인성교육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학생들이 체험장에 나가기 두 달 전에 미리 찾아가 ‘이곳에서 5일 동안 체험을 해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한다. 허락을 받은 후에는 학교에서 선생님과 함께 어떻게 활동할 것인지 의논하고, 활동 중 실수를 할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할지 상황극을 해보기도 한다.

 직업체험만 하는 게 아니라 문화체험도 가능하다. 고베 한국교육원도 이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지난해부터 다루미중을 비롯한 2개 중학교 학생들이 트라이 야루 기간에 한국 문화 체험을 하고 있다. 한복을 입고 절을 해보고, 장구를 쳐보고 한국어 강의를 들으면서 한국 문화를 이해한다. 조미옥 고베 한국교육원장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이유도 있지만, 다른 민족과 국가의 문화를 이해함으로써 공존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인성교육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고베(일본)=장주영 기자

트라이 야루 위크(Try Yaru Week)=효고현의 인성교육 프로그램. 모든 중학교 2학년들이 11월의 한 주 동안 학교를 대신해 다양한 곳을 방문해 봉사활동과 직업체험을 한다. 트라이(Try)에 일본어로 ‘의지를 갖고 행동하다’란 뜻의 야루(やる)를 붙인 말이다. 여기서 트라이는 중의적인 뜻으로 쓰인다. ‘시도하다’라는 본래의 뜻과 학교·지역·가정이 함께 아이들을 돌본다는 ‘트라이앵글(Triangle)’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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