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동양평화 추구한 사상가 안중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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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안응모
(사)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일본에 자민당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내각이 들어선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한국 관련 망언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지난 19일엔 일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정례 브리핑에서 “안중근은 범죄자”라는 막말을 함으로써 우리 국민의 분노를 사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청와대에서 중국의 양제츠(楊潔) 국무위원을 접견하며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하얼빈역에 기념 표지석을 설치하는 논의가 잘 진행되고 있다고 감사를 표시하자 스가 장관이 발끈한 것이다. 기념 표지석 설치는 박 대통령이 지난 6월 베이징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협조를 부탁한 사안이다. 스가 장관의 망언은 일본 정부의 대변인으로서 한·중 양국에 외교상 결례일 뿐 아니라 일 각료의 역사의식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걱정이 앞선다.

 스가 장관의 망언처럼 안 의사는 과연 범죄자인가.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한 직후 태극기를 꺼내 “코레아 우라!(한국 만세!)”를 삼창하고 러시아 헌병에게 당당히 체포됐다. 저격 직후 왜 도망가지 않았느냐는 일 검사의 질문에 안 의사는 법정에서 당당히 이토의 죄악을 밝히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토의 죄악 15개조’를 열거하며 의거의 정당성을 밝혔다. 날카롭고 거침없던 안 의사의 답변에 일본 검사는 움츠러들었다. 사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조차지였으므로 안 의사는 러시아 법원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 국제법을 무시하고 자국 관할이던 중국 뤼순의 관동법원에서 재판을 강행했다. 공판이 진행되던 당시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 일본 외상은 뤼순의 관동법원에 안 의사를 극형에 처하라는 지시를 1909년 12월 2일 전문으로 지령했다. 혹여 안 의사가 법정투쟁에서 승리해 풀려날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가 재판에 압력을 가한 것이다. 안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안 의사는 순국 직전 “내가 한 일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인이 서로 일치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할 것을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렇듯 안 의사는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일 양국이 협력해 평화와 번영을 누리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분이다. 오죽했으면 당시 옥중에서 안 의사를 접했던 많은 일본인 관리가 그의 인품과 기개에 감복했겠는가.

 반면 이토는 어떤 인물인가. 일본 내에서 근대 일본을 만든 위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동양평화를 짓밟은 침략자요, 제국주의자였다. 이토가 만든 근대 일본은 겉으로는 입헌군주제 근대국가를 표방했지만 사실 그 실체는 이웃 나라들과 끊임없는 전쟁으로 식민지를 확보해 나간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였다. 청일전쟁으로 대만이 식민지가 됐고 러일전쟁 후엔 대한제국이 보호국으로 떨어졌다. 이토 자신도 극동평화론을 내세웠다지만 그 실체는 일본의 지도 아래 아시아 국가들이 하나가 돼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이는 그의 사후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으로 부활했다. 대동아공영을 추구한 제국주의 일본의 행보가 결국 어떠했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생생히 기억한다. 엉터리 불법재판을 통해 사법살인을 저지른 일본은 전후 맥락을 알지도 못한 채 그들이 써놓은 판결문 몇 줄로 안 의사를 범죄자로 매도하고 있다. 안 의사가 주장한 ‘동양평화론’에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이 함께 평화로워지는 방략도 포함됐다. 스가 장관이 ‘범죄자’로 헐뜯은 안중근 의사야말로 현세를 살아가는 동아시아 사람들이 표상으로 삼아야 할 인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스가 장관은 역사 수업을 다시 받아야 할 것이다.

안응모 (사)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