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랜디제이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아시아」에서나「유럽」에서나『날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릴 수 없는 것이 미군인 모양이다.
『이프·지·아이·고, 아이·고!』(만일 미군이 물러나면 나도 자리를 물러나겠다!). 이것은 몇 해전 성조지가 그 지면을 장식한 명「헤들라인」-. 미군철수를 반대한 한 한국정치인의 얘기를 뽑은「캡션」이다.
요즈음 대서양의 이쪽저쪽, 구대륙과 신대륙을 오가는 정치인들의 말 가운데는「유럽」의 「핀랜디제이션」(Finlandization=「핀란드」화)이란 신어가 눈에 자주 뜨인다. 동서의 긴장완화, 미국의 향내 화.「크렘린」의 해빙미소 등 일련의 사태의「그릇된 귀결」이 자칫하면 미국 지상군의「유럽」으로부터의 철수를 가져와 그것이 결국은「유럽」에 있어서의 힘의 진공상태 내지는 힘의 균형파괴를 가져온다는 결구이다. 그 필연적인 결과는 모든「유럽」국가들을 소련의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압력 앞에「핀란드」와 같이 무력하고 불안한 중립화로 몰고 갈 것이라는 얘기이다.
사실 동서「유럽」의 병력을 비교해 보면 서구 사람들의 이 같은『「핀란드」화』에 대한 악몽이 단순한 기우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동구에는「바르샤바」조약동맹국의 91개 사단병력과 거기에 덧붙여 소련의 서부국경에 집결하고 있는 80개 사단병력에 대해서 서구「유럽」엔 NATO병력으로 고작 24개 사단만이 맞서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병력의 엄청난 불균형에도 불구하고「유럽」에 있어서 힘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미국지상군의『「유럽」현 전』과 미국 핵무기의 후위에 힘입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유럽」을 지배하려는 소련의 장기전략의 목표는 모든 수단을 다 해서 미국의「유럽」으로부터의 후퇴를 가져오게 하는 여건형성에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소련의 저의와 「유럽」의 위험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투철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아이러니컬」하게도 중공과 서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다.
마치,「유럽」방위전략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는 지난 년대이래 보수와 혁신, 또는 좌익과 우익의 전통적인 대립도식이 뒤집어졌거나 뒤죽박죽이 된 느낌마저 없지 않다.「드골」과 「아데나워」룰 머리로 한 서「유럽」의 전통적 우익보수세력인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이 독백 적「핵」을 갖춘「대 유럽」의「자주국방」을 꿈꾸고 있던데 반해서「브란트」수상과 「슈미트」국방상을 중심으로 한 서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일찍부터「유럽」방위전략의 근본을 미국의 핵우산과 미군의 주둔을 통한 대서양협력체제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해왔었다.
「파리」의 중공대사관의 한 고위외교관이「소련제국주의자」들의 서「유럽」정복을 막을 수 있는 길이 무어냐고 물은 어느 서방측 기자의 질문에 대해 일언지하에『미군을 묶어 두라』고 대답했다는 얘기도 재미있다.
최근「브란트」서독수상은 미국의「하버드」대학에 건너가서「마셜 계획」의 25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한 기회에 미국과「유럽」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기금으로 일금 5천만 불이라는 거액을 선뜻 내 놓았다고 보도되고 있다. 남의 일만 같지 않은 얘기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