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정권교체때마다 나오는 재벌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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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우려했던 일들이 너무 빨리 일어나고 있다. 경기하락이 심화하고 있으며, 주가는 폭락하고 기업의 투자 의욕이 급격히 악화되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올해 초부터 3월 5일까지의 기간 중 아태지역 주요 증시의 지수하락률은 3.34%인데 비해 한국의 거래소지수는 10.72% 하락했다.

세계경제 전체가 이라크전의 불확실성과 유가상승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한국의 주가하락은 이보다도 훨씬 심각하다. 한국의 경우에는 두 가지의 추가적인 불확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된 안보문제이고, 또 하나는 새 행정부의 기업정책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북핵 문제는 한국 정부 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문제의 핵심은 북한의 위협에 대응할 한국과 미국 간의 동맹체제에 대한 우려감이다.

새 행정부의 기업정책에 대한 불안감은 두 가지 요인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는 새 행정부가 말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다. 그 좋은 예가 법인세 인하에 대한 입장 차이다.

신임 재정경제부 장관은 앞으로 5년간 법인세율을 점진적으로 낮춰서 싱가포르의 수준으로 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이는 하루 만에 청와대에 의해 번복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 해프닝은 앞으로 나타날 많은 모순의 예고편이다.

그것은 바로 성장과 분배간의 모순이고, 경제자유주의와 반세계화주의 간의 모순이다. 새 정부의 중요한 정책목표인 '동북아 중심국가'는 기본적으로 우리 경제의 개방과 자유화를 전제로 가능한 것인데, 과연 분배와 형평을 강조하면서 내부 지향적인 시각을 가진 새 집권세력이 경제의 활성화에 필요한 개방을 할 수 있을지 의문시 된다.

이러한 경제철학을 둘러싼 갈등 말고도, 새 정부는 기업인들 사이에 불필요한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새 정부가 출범하기 일주일 전에 SK그룹의 회장을 전격적으로 구속한 것은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다.

당시에 검찰이 발표한 두 가지 이유 중에서 하나는 이미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며, 또 하나 비상장회사의 가치평가는 몇 가지 가능한 대안이 있는 애매한 문제다.

또한 새 정부 출범 후 일주일 만에 공정거래위원회는 6대 대기업 집단에 대한 내부거래 등을 조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불황이 심화되고 불확실성이 매우 높은 현재의 상황에서 기업의욕을 더욱 떨어뜨리는 조치다. 공정위는 이러한 조사가 정기적인 것이라고 말하겠으나, 타이밍은 매우 좋지 않다.

원래 새 정부가 출범하면 적어도 첫 반년 정도는 국민이 축제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갖고 새로운 각오로 임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출범 일주일 만에 기업을 위축시키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지 의문스럽다. 이는 새 정부 출범이라는 축제에 소금을 뿌리는 것인가, 아니면 축제에 속죄양이 필요한 것인가?

지난 30년 동안 정권교체기마다 대기업이 속죄양이 돼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른바 재벌개혁은 모든 새 정부의 기본 메뉴였다. 그러나 지금의 대기업은 1997년의 경제위기 이후에 수년에 걸쳐 시행된 지배구조의 개혁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기업들이다.

과거 30대 재벌의 절반이 문을 닫거나 소유권이 바뀌었으며, 살아남은 기업들은 새로운 전략과 방식으로 경영을 하고 있다. 이제 몇 년 간은 구조개혁이 뿌리를 내리도록 지켜볼 필요가 있다.

기업은 매일 매일 심판을 받는다. 샴푸회사는 고객이 매번 수퍼마켓에서 내리는 구매의사 결정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 또한 상장회사들은 투자자들이 내리는 매매 결정에 따라서 자금조달원이 막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기업은 상품시장과 요소시장에서의 규율에 의해 생존이 결정되는 것이지, 정부에 의해 인위적으로 운명이 결정돼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5년에 한번씩 심판을 받지만, 기업은 매일 심판을 받는다. 그것도 국내 만이 아니고 세계의 소비자에 의해서 말이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이제 보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좀더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를 하기 바란다.

그리고 경제의 근간인 기업 겁주기는 당분간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 가뜩이나 기업하기 어려운데 정부까지 나서서 괴롭혀서야 누가 기업할 마음이 나겠는가.

정구현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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