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진 중동 우방 … 오바마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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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중동의 정치 지형도가 급변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이 동맹 미국에 잔뜩 골이 난 반면 이란은 적대국 미국에 적극적인 구애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주도한 이란과의 제네바 합의가 만들어낸 변화다. 그동안 사우디와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편들어 왔던 미국이 무게의 추를 이란 쪽으로 옮기면서 힘의 균형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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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우디는 미국의 ‘위대한 친구’였던 이란 팔레비왕 시절을 잘 기억하고 있다. 미국과 이란이 다시 그때로 돌아가기는 어렵지만 두 나라의 최근 화해무드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사우디 정부와 언론은 연일 높은 목소리로 미국을 비난하고 있다. 일간지 알리야드는 “제네바 합의는 미국과 이란이 가까워지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지적했다. 국정자문기구인 슈라회의 의장 압둘라 알아스카르는 "이제 중동은 편히 잠잘 수 없게 됐다”고 우려했다. 사우디는 미국에 의존해 왔던 방위정책을 재검토하겠다는 경고를 할 정도로 격앙돼 있다.

 이슬람 다수 수니파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사우디는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과 뿌리깊은 라이벌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우디는 이란의 영향력이 큰 이라크·시리아·레바논·바레인에 둘러싸여 있다. 자칫하다간 ‘치명적인 위협’으로 여기는 이란과의 지역 패권다툼에서 완전히 밀려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사우디는 이란이 제네바 합의 내용을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시간을 벌면서 은밀히 핵무기 개발을 지속할 거란 얘기다. 일단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면 사우디로서는 이란을 막을 수단이 없어지게 된다. 미 브루킹스 연구소의 케네스 플랑크 연구원도 “이란이 이스라엘과 사우디를 능가하는 힘을 가지게 되면 중동의 세력균형은 크게 바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스라엘의 입장도 사우디와 비슷하다. 사우디는 앙숙인 이스라엘과 손잡고 이른바 ‘수상한 동맹’으로 이란 핵 합의를 하지 못하도록 로비를 벌여 왔다. 지난주 23명의 희생자를 낸 레바논 베이루트에서의 연쇄 폭탄테러는 핵 합의를 앞두고 사우디가 이란에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고 보는 언론도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최악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제네바 합의는 역사적인 실수”라고 비난하며 이란 핵 시설에 대한 독자 공격 여지를 남겼다.

네타냐후는 이란 제재 강화를 주장하는 미 의회에 기대를 걸고 있다. 미국 내 유대인 단체의 입김을 의식한 의원들이 오바마의 대이란 외교노선에 제동을 걸고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적극 개입하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은 네타냐후 총리의 반발에 부닥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오바마도 이런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게 딜레마다. 전통의 우방을 다독이는 동시에 간신히 개선의 조짐을 보이는 이란과의 관계도 이어가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미국의 또 다른 동맹인 이집트도 마음을 돌리고 있다. 미국이 시아파 이란에 가까워질수록 사우디와 쌍벽을 이루는 수니파 강국 이집트와의 사이는 더욱 멀어질 전망이다.

한경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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