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탈출 우리 힘으로, 쪽방촌의 창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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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역 주변 쪽방촌 주민들이 설립한 대전 선화동 ‘아나바다협동조합’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청소기 등 중고 가전제품을 고치고 있다. 협동조합은 시민들이 기증한 중고 가전제품을 수리해 싼값에 판매한다. [대전=프리랜서 김성태]

지난 8월 어느날 아침. 대전역 근처 해장국집에 40~50대 남성들이 모였다. 인근 새벽 인력시장에 조금 늦게 나갔다가 허탕을 친 ‘대전역 쪽방촌’(삼성동) 주민들이었다. 누군가 말을 꺼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침묵이 흐른 뒤 김은수(40)씨가 말했다. “힘을 모아 사업을 한번 해보자. 잘되면 이웃들한테도 일자리를 주고.” 그게 지난 15일 대전 옛 중심가인 선화동에 사무실을 차리고 사업을 시작한 ‘아나바다협동조합’의 첫걸음이었다. ‘아나바다’란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의 준말이다.

 조합은 개소식에서 이런 강령을 밝혔다. “수입의 50%로만 성실하고 건강하게 생활하며, 20%는 밝은 미래를 위해 공동으로 저축하고 나머지 30%는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 요컨대 조합이 버는 수익의 70%만 출자자와 직원들 월급과 공동저축으로 똑같이 나누겠다는 것이다. 매달 한 차례 대전역 광장에서 노숙인과 노인을 대상으로 무료 급식 봉사활동도 펼칠 계획이다.

 조합원들이 사는 대전역 쪽방촌은 5.5㎡보다 작은 방 574개가 있는 곳. 주민 80% 이상이 기초생활수급자다. 대부분 노인들로 정부·지방자치단체 지원금에 폐지를 주워 팔아 모은 소득 등을 더해 살아간다.

 공사장에 나가는 40~50대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 하지만 부동산·건설 경기가 나빠지면서 이들도 살아가기가 녹록지 않게 됐다. 그래서 스스로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실제 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고 했다. 뭘 하려 해도 밑천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마을에 들렀던 사회복지사가 적은 자본으로 사업을 할 수 있는 협동조합을 소개했다. 5명이 친척에게 매달리고 해서 어렵사리 100만원씩, 500만원을 모아 조합 출자금을 마련했다. 협동조합 김종민(44) 사무국장은 “출자자들에겐 100만원이 대단히 큰 돈”이라며 “스스로도, 일반 주민들도 평생 쪽방촌을 전전하는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는 염원에서 출자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업은 안 쓰는 중고품을 거둬다 수선해 되파는 일로 정했다. 손재주가 필요하고 품이 들 뿐, 큰돈은 필요치 않은 사업이었다. 대전시는 이들에게 5000만원을 지원해 50㎡ 크기 사무실 겸 판매장을 열고 중고품 수거용 1t 트럭을 장만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대전시내 44개 마을기업과 협력관계를 맺도록 밀어줬다. 마을기업도 대부분 형편이 어려운 이들이 모여 세차·세탁소 등을 하는 곳이어서 사정이 비슷한 아나바다협동조합과 서로 돕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협력 관계를 맺다 보니 사업을 시작한 지 열흘도 채 안 돼 수리·청소할 가전제품·의류 등 100여 점이 모였다. 출자 조합원 5명으로는 일손이 모자라 지역 주민 5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이들 역시 “수익의 30%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쓴다”는 강령에 동의하고 들어왔다. 고쳐 놓은 세탁기가 바로 팔려 나가는 등 하나 둘 매출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합이 고용한 직원 김왕(40)씨는 “특히 겨울이면 공사장 일거리가 없었는데 이젠 일터가 생겨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아나바다협동조합 엄영화(59) 대표는 “쪽방촌 주민들이 혼자서는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을지 모르지만, 힘을 합치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조합을 통해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대전=서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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