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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제26화>경무대사계(95)|김상래<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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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만송, 부통령 출마>
새 보안법에 대한 이박사의 태도가 어떠했든 간에 법 공포 후 언론 탄압은 표면화 됐다. 자유당은 당시 장면부통령과 같은 종교인 천주교 재단에서 경영하고있는 경향신문이 가장 비판적이라 하여 눈의 가시처럼 여겼다. 59년4월30일 밤 공보실장 전성천씨 이름으로 된 발행허가 취소통지서가 경향신문에 전달됐다.
이로 인해 사회 여론은 물 끓듯 시끄러웠고 서울 고법은 경향신문 제소에 따라 발행허가 취소행정처분 집행 정지를 결정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물러서지 않고 같은 날 밤 다시 무기발행정지 처분을 내렸다.
한편 이런 일이 있기 전인 59년3월 자유당 정부는 다음해 정·부통령 선거에 대비키 위해 내무장관에 최인규씨를 임명하는 등 5부 장관을 경질했다.
최 장관은 취임하자말자 『공무원의 대통령 선거운동은 근무시간 이외에는 무방하다』고 공언하는 등 선거장관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부통령에 낙선한 후 다시 국회의장이 된 만송 이기붕씨는 건강이 좋지 않아 여러 번 공직을 떠나려 했다.
만송은 이재학·한희석 두 부의장에게 공무를 맡기고 휴양을 다닐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박사도 물론 만송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통령후보에 나서는 것이 적합치 못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당시 주변에는 만송만큼 자유당을 그런 대로 조정해가며 이끌어 갈만한 역량과 위치를 가지고있는 사람이 없었을 뿐더러 다음해 선거에서 부통령후보를 대신할 마땅한 사람도 없었다. 말하자면 만송 이외에는 사람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정으로 고민하고 있던 중 최인규 내무장관이 『민주당에 정권을 넘기지 않으려면 만송을 부통령에 앉힐 수밖에 없다』고 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터라 자유당 간부들은 만송을 부통령으로 입후보하도록 이 박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장경근·한희석씨 등이 이런 사정을 보고하자 이 박사는 『그 사람은 건강도 나쁜데 휴양이나 시켜』라면서 한마디로 반대했다.
이 박사는 만송이 경무대를 드나들 때 부인 박「마리아」의 부축을 받아 가며 겨우 차에 오르내릴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으로 보아 왔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자유당 간부들은 달리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걱정이 컸다. 간부들은 자유당 정책위에서 아예 만송을 부통령후보로 결정해 버리면 이 박사도 하는 수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박사에게 『자유당 정책위가 만송 선생을 부통령후보로 결정했다』고 보고했다. 이박사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던지 『자유당에서 그렇게 정했으면 하는 수 없지』하고 이를 수락했다.
이어 자유당은 59년6월 제9차 전당대회를 열고 제4대 정·부통령선거에 나설 후보로 이 박사와 만송을 추대했다.
그때 내가 들은 얘기로는 최 내무가 만송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자고 강력히 주장한 것은 그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였다고 들었다.
최 장관은 여든이 넘은 이박사가 오래 지탱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만약 이박사 유고시에 만송이 권한을 대행할 것이지만 만송 자신 건강이 나빠 국사를 다룰 수 없을 것이니 자신이 실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얘기였다.
사실이 어떠했든 간에 그후 자유당 간부들 가운데 대통령 유고시에 이기붕씨가 권한을 대행하되 실제 집정은 못할 것이니 최인규 장관을 부통령 격으로 일을 배우게 한 후 나중 대통령으로 입후보하도록 하자는 얘기가 돌았던 것으로 알고있다.
여하간 최 장관은 당시 정·부통령 선거를 책임 맡은 선거장관이기도 했지만 이 정도로 능력이 높이 평가됐고 배짱도 있었다. 최 장관은 선거가 가까와지면서 공무원의 선거운동 관여가 크게 논란이 됐을 때도 『전 책임은 내가 질 터이니 공무원의 선거운동은 무방하다』고했다.
만송은 이 박사와 더불어 다시 정·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됐지만 자신은 별생각이 없었다. 앞에 말한 것처럼 자유당 정권 내부사정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지만 여기에는 부인 박「마리아」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박 여사는 처음엔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 만송이 자유당 일을 맡은 후부터 정치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 나중에는 만송을 제쳐놓고 자신이 직접정치를 했다.
박 여사가 얼마나 정치에 관심이 컸던가는 자신이 직접 국회의원에 출마하겠다고 하여 며칠을 두고 부부싸움을 했었다는 사실로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녀는 만송의 건강에 대해 아내로서의 보살핌보다는 권세욕이 지나쳐서 만송의 건강을 더욱 나쁘게 해서 나중에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박 여사의 지나친 권세욕과 주변사정이 얽혀 만송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 되고 만 것이다.
이 박사는 이박사대로 인의 장막에 가려져 주변 몇몇 사람의 보고만이 진실인 것으로 생각하게돼 사실처럼 믿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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